주노 디아즈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지난 할아버지 제사 때도 가족들은 둘째 작은엄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작은엄마의 사주팔자론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부부 싸움 중인 동생에게) 니 사주엔 외로움이 끼어있응께 어쩔 수 없어. (크고 작은 사건을 달고 사는 삼촌에게) 그래도 장수할 팔자야. 사는 게 힘들어도 건강한 게 장땡이지. (막 취업한 사촌에게) 니 잘 되는 건 다 사주 때문이여. (필리핀에서 사업 중인 삼촌의 아내에게) 삼촌한텐 떠돌아다니는 사주가 있응께 괜히 방해하지 마. 난 주변 사람들의 호응이 더 불만이다. 100불이면 유전자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사주라니. 물론 냉소적인 나한테도 한 마디 던진다. 안 믿어도 소용없어. 다 사주대로 되는 겅께.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도 도미니카식 사주가 소개된다. 푸쿠다. 굳이 번역하면 저주에 가까운 말인데, 오히려 삼재나 액년과 유사하다. 물론 푸쿠는 해를 가리지 않고 은연중에 찾아온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낯선 도미니카 공화국의 한 가족, 우리의 오스카 와오와 그의 엄마 벨라, 그리고 할아버지 아벨라르의 안 풀려도 너무나 안 풀리는 인생을 소개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것인가. 도미니카 사람들은 다 푸쿠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처음에 노예들의 신음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한 세계가 스러지고 다른 세계가 시작될 때 누군가 내뱉은 한마디였고, 타이노족을 죽음으로 몰아간 근원이었다고, 서인도제도에 빠끔히 열린 악몽의 문틈을 비집고 창조 안으로 숨어 들어간 악령이었다고 말한다. 푸쿠 아메리카누스, 또는 흔히 푸쿠라고 부르는 그것은 대개 모종의 파멸이나 저주를, 특히 신세계의 파멸과 저주를 가리킨다. (P.13)
아이들은 삼재의 대상이 아니란다. 부모의 사주가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어서? 나이가 어릴수록, 아이의 삶은 부모 통제가 가능하다. 통제 밖 우연의 영역을 부모의 근면성실함으로 커버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크면, 그들은 자신의 사주와 푸쿠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부모의 비닐하우스를 벗어나는 순간. 아이들은 사춘기의 실연이라는 첫 위기에 봉착한다. 부모의 사랑은 투자가 필요 없다. 혹은 적은 투자만으로 큰 사랑을 회수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사랑은 다르다. 투자금을 완전히 잃을 수도, 시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관계의 냉혹한 원리를 깨달을 때, 아이들도 사주와 푸쿠의 존재를 확인한다. 우리의 오스카 와오처럼.
불쌍한 오스카. 녀석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미 (온 세상 꼴통들의 얄궂은 운명인) ‘그냥 친구로 지내자’류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렸다. 이런 관계는 차꼬가 채워진 사랑이라고나 할까, 일단 안에 들어가면 엄청난 괴로움은 보장되지만, 막상 나올 때는 씁쓸함과 가슴 찢어지는 경험 말곤 얻는 게 없는 그런 관계다. 아, 어쩌면 자기 자신과 여자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어질 수 있겠다. (P.56)
부모의 사주고 푸쿠도 문제다. 아이를 보호해주기는커녕, 부모의 푸쿠가 아이들에게도 전염된다. 온갖 재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고, 자기도 모른 채 삶의 밑바닥으로 조금씩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부모는 아이의 짐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스카의 누나 롤라에게 엄마란 그런 존재였다. ‘평생 자식이나 세상에 긍정적인 말이라곤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엄마’. 롤라는 말한다. ‘언제나 의심뿐이며 자식의 꿈같은 건 갈가리 찢어놓고 짓밟는 엄마 밑에서 자란다는 게 어떤 건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P.74) 엄마 벨리의 삶은 실제로 그랬다. 세상에 긍정적인 말이라곤 단 하나도 할 수 없는 삶. 부모의 사주와 푸쿠는 아이의 사주도 오염시킨다.
때론 오스카의 할아버지 아벨라르처럼 ‘대부분의 국민들이 돌멩이와 카사바 쪼가리로 연명하며 온갖 기생충의 숙주가 되는 동안’ ‘빌리크제 은식기에 담긴 파스타와 달콤한 소시지를’(P.254) 먹는 호화 사주를 타고나도 시대의 사주 혹은 역사의 푸쿠가 가만두지 않는다. ‘득표율 103퍼센트’로 당선된 도미니카의 악랄한 독재자 트루히요의 저주가 아벨라르의 타고난 사주를 집어삼켰다. 물론 작은엄마라면 아벨라르에게 40대 중반 몰락 사주가 이미 있었다고 했겠지만. 만약 아벨라르가 좀 더 일찍 쿠바로 도망갔다면 자신의 사주와 푸쿠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네 엄마가 원하는 일이고, 내가 원하는 일이고, 옳은 일이기도 해.
내가 원하는 건요?
미안하다.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열심히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 버린다. 누군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고. (P.245-246)
세상은, 그리고 인생은 유전자와 과학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로 가득 차있다. 과학이 세상의 근본 원인을 탐구하려는 야심이라면, 사주와 푸쿠는 불가사의한 세상을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작은엄마의 사주팔자론이 가족들에게 인기 있는 건지 모른다. 작은엄마 말대로 모든 인생이 사주의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면, 부모의 노력으로 세상의 험난함을, 아이의 불행을 막아줄 수 없다. 사실 사주와 무관한 인생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행보를 되돌아보면, 아찔하다. 무수한 행운과 기적 덕에 무탈하게 여기까지 오게 됐다. 다시 반복한다면. 오스카처럼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저주라고 말하겠지./ 난 삶이라고 말하겠다. 삶이라고. (P.251) 롤라식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주나 푸쿠가 있건 없건, 부모의 바람으로 아이 인생의 변화무쌍함을 제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사주팔자를 논하며 부적 따위를 붙여놓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도 한심하다. 기도가 해결책이 될 수도 없다. 때문에 그 변화무쌍함이, 때론 느닷없이 새똥을 맞기도 하고, 사랑을 거부당할 수도 있으며, 온갖 불가사의한 불운으로 힘들어질 수 있는 게 인생이란 사실을 아이에게 잘 알려주는 게 근면 성실한 부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 아닐까. 변화무쌍함을 온전히 받아들이다 보면, 끝이 어떻게 될 진 아무도 모르는 거니.
파이트는 말한다. “내가 옳은 일을 한 거지, 그렇지? 결국은 일이 다 잘 풀렸어.”
그리고 맨해튼 박사가 우리의 우주에서 스러지기 전에 대답한다. “결국이라고? 결국이란 없어, 아드리안. 세상에 진정한 결말이란 없거든.” (P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