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by 알스카토

어렸을 때 기계적으로 암기했던 속담들을 성인이 되어 찬찬하게 뜯어보면 그 안에 담긴 적확한 진실에 소름이 돋는 경우가 있다. 요즘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란 말이 종종 떠오르는데, 어렸을 땐 이 속담의 표현에 일종의 시적 과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뒤로 넘여졌는데 코가 깨진단 말인가. 마흔이 된 지금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건 물론 물리학 법칙을 거스르는 온갖 기묘한 부상이 가능하단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뒤로 넘어져도 어디든 다칠 수 있다. 그게 인생이고 삶이다.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미시적인 깨달음을 사회적으로 확장한 게 스위스 치즈 이론이다. 사고는 다양하지만 사소한 원인들이 중첩되면서 발생한다는 것, 사고의 직접적인 트리거가 있더라도, 다양한 요소들이 트리거의 촉발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 한 마디로 스위스 치즈의 구멍이 우연히 일직선 위치에 놓였을 때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원인이 우연하게 들어맞을 때 큰 사고가 발생한다는 게 스위스 치즈 이론이다. 스위스 치즈 이론은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이유를 분석해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한 남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마르케스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죽은 자신의 친구 산띠아고 나사르의 사망 원인을 파헤친다. 소설은 한 편의 탐사보도다. 친구의 죽음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당혹스럽다. 순결이 목숨만큼 중요하던 약 30년 전 콜롬비아의 시골 마을에서 새 신부 앙헬라 비까리오는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첫날밤 쫓겨난다. 앙헬라는 자신을 범한 사람으로 산띠아고를 지목하고, 그녀의 쌍둥이 형제들은 산띠아고를 살해한다. 문제는 쌍둥이 형제가 산띠아고를 죽이기 전까지 죽음을 막을 순간이 너무나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담당 수사 판사)는 제비뽑기를 하여 자신에게 배정된 그 수수께끼 같은 사건 때문에 적잖게 당황한 나머지 직무가 요구하는 엄격성과는 상반되는 시적 오락에 자주 빠져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문학에서도 허용되지 않던 수많은 우연이 인간의 삶에 작용하여 그처럼 확실하게 예고된 죽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P.127)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불운들이 터무니없이 연속적으로 겹치면서 예고된 죽음이 실행됐다. 통계를 신봉하는 합리주의자 입장에서 산띠아고 나사르에게 벌어진 불행은 무시할 수준의 낮은 확률이지만, 마르케즈가 묘사한 우연적인 에피소드들이 워낙 그럴듯해서, 메멘토 모리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내가 현재 발 딛고 있는 평안이란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한 번의 불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면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는지를 마르케스는 27년 전 발생한 한 불운한 죽음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불가사의한 일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때 불가사의한 사건의 분석은 무의미하다.


나 같은 근대적 합리주의자의 불행은 불운한 사건을 분석해서, 그 안에서 교훈을 도출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된다. 인생이 더럽게 안 풀릴 때, 그 순간을 칼로 도려내고 싶을 만큼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슬럼프에 빠지고, 슬럼프가 다시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올 때 소파에 가만히 누워 생각한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모든 일의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마르케스처럼 스스로의 슬럼프 연대기를 작성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답을 찾을 수 없다. 이 난관 앞에서 분석적인 사고는 분석을 하려는 욕망에 지배된다. 그 결과 엉뚱한 무언가가 슬럼프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다. 그때 그것만 하지 않았더라면. 다 그 일 때문이야. 그때 그 친구만 안 만났더라면. 하지만 이건 마치 나 스스로의 찜찜함을 없애기 위해 억지로 원인을 찾아내는, 마녀사냥 같은 짓일 뿐이다.


어느 날 새벽의 수탉 소리에 우리는 불현듯 그 터무니없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연쇄적 우연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리고 한 것은 여러 가지 미스터리를 풀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P.123)


원인을 찾아 불행의 미스터리를 푸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찾아봤자 남는 건 회한뿐. 산띠아고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기 전날 꾼 흉몽을 길몽으로 착각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후추 씨를 씹는 악습에 빠져들고 만다. 하지만 꿈을 제대로 해석했던들,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결국 되돌아가기 힘든 슬럼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숙명이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를 알고 수용하는 일이다. 분석해서 원인을 찾아 회한의 늪에 빠지는 대신 비극적 운명을 수용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 근대주의자들이 그토록 거부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론’을 받아들여 현재의 슬럼프를 극복하라는 게 환상주의 소설의 대가 마르케스가 쓴 탐사보도의 교훈이다. (마지막까지 교훈을 찾아내려는 근대주의자의 강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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