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니것 <갈라파고스>
커트 보니것의 기획의도는 유발 하라리와 닮아있다. 둘 다 시간의 족쇄를 풀고 인류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한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의 불가해한 특성을 학술적인 언어로 분석했고, 커트 보니것은 인류의 불가해성 그 자체를 소재 삼아 소설을 창작했다. 커트 보니것에게 인류는 사랑해야 하지만, 좀처럼 따스하게 안아줄 수 없는, 얄미운 욕심쟁이다. 인류의 욕심은 늘 인류의 시스템 자체를 위협한다. 소탐대실. 때문에 인간의 멍청함을 보여주는 게 보니것의 목표다. <제5도살장>에서 과거,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외계인을 등장시켜 인간의 근시안적 한계를, <고양이 요람>에선 산 로렌조 왕국의 멸망을 통해 욕심의 위험성을 보여줬다.
보니것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멍청함을 보지 못했다. 답답했던 노 작가는 <고양이 요람>에서 하나의 나라와 종교를 붕괴시키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보니것은 백 만년 뒤로 간다. 인간의 커다란 두뇌가 진화의 과정 속에서 퇴화해버린, 새로운 인종의 시선으로 백 만년 전 지구 멸종의 순간을 회상한다. 뇌가 작아지고, 손과 발은 지느러미로 바뀌고, 물에서 자유롭게 고기를 잡으며, 사랑이라고는 발정기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바다 이구아나를 죽이지 않고도 해초를 소화할 능력을 지닌 새로운 종의 탄생 기원을 밝혀낸다. 이 원대한 스토리가 고작 250페이지. 뭐가 어렵겠는가. 보니것인데.
내 이야기의 출발점인 1백만 년 전, 우주라는 시계장치의 지구 부분이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았다. 지구의 부속품 중에 인간이라는 것들이 어디에도 맞지 않게 되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부속품들까지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라면 나는 그 고장이 수리 불능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인간이라는 부속품의 구조에 몇 가지 수정이 이루어지고 나니, 시계장치의 지구 부분이 지금 같은 모습으로 영원히 째깍거리며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모종의 초자연적 존재나, 비행접시를 타고 다니는, 내 아버지가 사랑해 마지않던 외계인이 인류를 자연과 조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나는 ‘자연선택의 법칙’이 아무런 외부 도움 없이 그 수리 작업을 마쳤다고 선서하고 증언할 용의가 있다. (P.245)
보니것은 인간을 지구 상에서 지워버렸다. 그러고선 천연덕스럽게 인간의 멸종을 다윈이 발견한 인류의 위대한 법칙 탓으로 돌린다. 어째서 자연선택의 법칙은 인간의 모습을 어류 비스름한 것으로 바꾼 걸까. 보니것은 불필요하게 큰 뇌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커다란 두뇌의 시대’라 부르는 시기, 인간의 뇌는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었다. 멍청함의 근원이자, 우울함의 출발이었다. 사실 보니것의 작품 대부분은, 웅장한 상상력과는 별개로 엄정한 지식에서 출발한다. <갈라파고스>에서 지적하는 ‘큰 뇌’의 문제점 역시 유발 하라리의 인류학적 고찰에서부터 최근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들까지 이젠 주류 학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큰 뇌는 탐욕을 실현시켜주는 기계다. 부유한 여자들을 농락하는 사기꾼 제임스 웨이트의 뇌는 스위스 시계의 부품처럼 정교하게 작동한다. 큰 뇌는 인간이 이런저런 불가사의에 쉽게 빠지게 도와줬으며, 그 덕분에 유발 하라리가 언급했던 상상의 질서를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게 됐다. 종이에 돈이란 권위를 부여할 수 있지만, 때론 경제적 위기가 종이를 순식간에 바나나 껍질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남편을 잃은 메리 햅번의 뇌는 끊임없이 그녀를 우울하게 만든다. 온갖 우울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창작해낸다. 탐욕 앞에서는 정교하지만, 때론 탐욕이 뇌의 작동을 방해하기도 한다. 바이아 데 다윈호 출항을 결정한 아돌프 폰 클라이스트 선장이 그랬다. 큰 뇌는 심지어 자신이 내린 잘못된 결정을 교묘하게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큰 뇌의 시대, 큰 뇌들이 벌이는 온갖 오류 앞에서 보니것은 반문한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3킬로그램짜리 두뇌란 치명적 결함이 아니었을까?”
“과거 우리가 곳곳에서 보고 들었던 죄악의 원천을 찾는다면, 지나치게 정교한 우리의 신경 회로 말고 달리 무엇이 있었을까?”
자문자답이 되겠지만, 나의 대답은 이렇다.
“다른 원천은 없었다. 지구는 아주 순결한 행성이었다. 그들 커다란 뇌만 빼면.” (P.13)
1백만 년 전의 인간들이 자기네 커다란 뇌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회의하기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날지 못하는) 가마우지의 선조들도 진화의 계보 어디쯤에선가 자기네 날개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P.33)
보니것의 깨달음을 미시적으로 적용해본다. 큰 뇌의 시대, 여전히 나의 큰 뇌는 나를 쉴 새 없이 괴롭힌다. 대부분 내가 선택한 잘못된 결정 때문이다. 때론 탁월한 사후 합리화 능력 덕에 잠시 고통을 모면하지만, 삽질 보존의 법칙에 따라 내가 회피한 고통은 누군가의 고통으로 전가된다. 보니것 소설을 읽는 엘리트 독자답게 나는 사후 합리화보다는 후회에 집중한다, 존 그린리프 휘티어가 했던 명언. ‘혀나 펜에서 나올 수 있는 그 모든 슬픈 말 중에서,/ 가장 슬픈 것은 이 말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는데!”’ 큰 뇌가 범할 수 있는 다양한 오류 중 메리 햅번에게 작동했던 오류, 후회가 끊임없이 몰려온다.
후회하지만, 또 욕심을 품고, 그로 인해 잘못된 결정을 하고, 주변에 피해를 끼치고, 때론 사후 합리화로 상황을 모면하지만 다시 후회가 시작되는 무한 루프. 큰 뇌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갈라파고스>에서 선장은 잘못된 결정을 내린 죄를 물어, 자신의 뇌를 스스로 해고한다. 결국 온갖 마음의 소리가 스스로를 괴롭힐 때, 필요한 건 뇌의 일시적 해고, 정직이나 근신 명령이 필요하다. 문제는 방법이다. 어떻게 뇌에게 정직을 명령한단 말인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내겐 <갈라파고스>의 이 문구가 도움이 됐다. 후회의 순환 고리를 끊게 해주는 일종의 주문.
나는 지금, 누구든 카자크의 때 이른 죽음을 두고 연민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 그 녀석, 어차피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작곡할 재목은 아니었어.”
제임스 웨이트의 죽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아, 그 친구, 어차피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작곡할 재목은 아니었어.”
얼마나 오래 살았든 우리가 살아생전에 성취한 것이 십중팔구 하찮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는 이 삐딱한 논평은 나의 창작이 아니다.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