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런 제임스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1.
자기야, 나는 그 어떤 거도 우연에만 맡겨 두지는 않아. (2권, P.52)
마흔이 된 신년, 질문이 떠오른다. 지난 40년간 넌 제대로 살았는가. 아니. 곧 뒤따르는 질문. 남은 인생이라도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나. 원래 매년 새해가 되면 지난 1년간의 인생은 내 삶에서 떨어져 나간 시간이라도 된 듯, 새로운 계획들을 세웠다. 마치 1월 1일이 내 인생의 변곡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새해의 계획 세우기는 신년을 맞는 나만의 의식인 셈이다. 올해는 특히 마흔이란 나이 알람과 함께 좀 더 체계적이고 중장기적 계획을 세워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계획은 계획일 뿐이고, 대부분의 계획은 엉망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때문에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것 아니겠나.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하나씩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진.” 미래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수한 요소가 작동한다. 그 불안요소가 계획 속에 슬그머니 침투하여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렇다고 운명론자처럼 체념만 할 수는 없다. 계획 짜기는 삶이 선사하는 무작위의 힘에 저항하는 인간 의지의 산물이다. 내 삶을 스스로 통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그리하여 마흔을 앞둔 나는 스스로에게 통제의 주문을 걸 듯, 계획을 세운다.
2.
목사는 사람들의 삶에는 저마다 신이 만들어놓은 빈 공간이 있다고 떠들지. 하지만 게토 사람들한테는 그 공간에 채워 넣을 수 있는 게 허무뿐이지. (1권, P.29)
마흔의 계획을 세우기 직전 집어 든 책이 2015년 맨 부커 수상작인, 말론 제임스의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다. 소설 속에는 인생의 사전에 계획이란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무수한 군상이 등장한다. 사실 계획은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인생의 무질서가 낮은 사람이 독점하는 일종의 정신 유희다. 말론 제임스의 소설 속 배경, 자메이카 게토에서 죽음은 일상이다. 변기가 없는 곳에서 살며, 돌, 막대기, 총알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았다 해도, 물 한 잔 마시고 죽을 수 있는 상황, 세 명 중 한 명은 평생 취직이란 걸 할 수 없으며, 경찰과 군인이 경쟁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무법천지에서 행복해지지 않기로 되어 있는 게 설정 값인 사람들이 소설 속 주인공이다.
물론 자메이카에도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들. 권력을 잡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권력 장악 계획에 국민 행복 따위는 변수가 아니다. 갱들은 정치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서로를 죽이고 죽인다. 이때 새로운 계획이 등장한다. 가수, 밥 말리의 평화 콘서트 계획. 자메이카 평화를 위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좋은 계획은 어떤 사람에게 나쁜 계획이다. 소설은 밥 말리 암살 계획과 함께 시작된다. 자메이카의 혼란에 미국 CIA의 계획이 추가된다. 미소 냉전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 미국은 중남미 정치에 교묘히 개입해 사회주의 정권의 집권을 방해했다. 혼돈은 가중된다. 거대한 권력들의 계획 앞에서, 개인들의 계획은 무력화된다.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건 목줄이 당겨져 다시 뒤로 물러나기 전까지 일뿐이다. 주인이 그런 거지 같은 짓은 이제 됐어, 우리는 그쪽으로 가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기 전까지. 바빌론의 목줄, 경찰의 목줄, 총기 법원의 목줄, 자메이카를 운영하는 23개 가문의 목줄, 그 목줄은 2주 전, 시리아 출신의 쌍년인 피터 나세르가 내게 암호로 뭔가를 말하려 했을 때 이미 당겨졌다. 그 목줄은 일주일 전, 미국인과 쿠바인이 내게 무정부 상태가 뭔지 가르쳐주겠다면서 색칠공부책을 가지고 왔을 때 이미 당겨졌다. (2권, P.248)
가수의 암살을 주도했던, 갱 두목 조시 웨일즈는 1966년 개발이란 이름 아래 자신이 살던 마을이 지도 위에서 지워지는 경험을 했다. 자물쇠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던 조시 웨일즈는 철거 과정에서 총알 5발을 맞고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그때 이후, 조시 웨일즈는 머릿속에서 미래를 지운다. 계획과 희망은 모든 거짓 수사에 불과함을 깨닫고, 기꺼이 권력의 계획을 이행한다. 조시의 눈에 가수의 평화 콘서트도 기만이다. ‘평화란 내 딸이 자면서 땀을 흘릴 때 그 애 이마에다가 바람을 조금 불어주는 것이다’라는 게 조시의 생각이다. 조시의 냉소가 머리를 때린다. 계획을 세우는 일이 인생에서 필요한 건가, 그게 나이 마흔이건 쉰이건 말이다.
3.
하지만 어쩔 때는, 잘은 몰라도, 뉴욕 거리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뭐 그런다고 삶의 문제들이 쉬워진다거나 처리 가능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냥 계속 걸어갈 수는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2권, P.286)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소설가 김영하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를 두고 얘기했던, 대체 불가한 유일무이 체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물론 이야기 왕국의 진입 장벽이 높다. 자메이카의 정치 상황과 70년대 국제 정세가 소설 속에 녹아있다. 등장인물도 엄청나게 많다. 툭툭 튀어나오는 파투아(자메이카식 영어)도 낯설다. 플롯도 여러 인물들의 독백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의 능동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소설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70년대 자메이카의 혼돈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된다. 특히 당시의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말론 제임스는 자지, 보지, 씨팔, 썅년 등 문명인이라면 입에 담지 말라고 배운 성차별, 인종차별적 욕설이 가득한 문체를 사용한다.
V. S 나이폴이라고. 브레드렌. 그자가 말하기를 웨스트 킹스턴은 너무 좆같이 구려서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는 공간이라고 했다네. 왜냐면 사진 촬영이라는 과정의 미학이 실제로 그곳이 얼마나 추잡한지 감추고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아, 읽었어? 내 말 믿게. 나이폴 말도 틀린 거야. 나이폴이 그 문장을 쓸 때의 그 아름다움이 게토가 얼마나 추한지 감추고 거짓말을 하게 되거든. 거긴 너무 추해. 게토에서 예쁜 문장 같은 걸 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네, 절대로. (2권. P.305)
유일무이한 체험이긴 했지만, 마흔의 계획을 세우기 직전에 말론 제임스의 세 번째 소설을 집어 든 건 잘한 일일까. 일단 일반적인 관점의 계획 세우기는 실패다. 물론 여긴 1970년대의 자메이카는 아니다. 하지만 세계가 작동하는 구조와 삶에 숨어있는 본질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계획의 정의를 바꿀 수는 있겠다. 실용적이고 미시적인 계획은 외부의 불안 요소에 취약하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현재의 행동을 통제하는 방식은 적절치 않다. 작심삼일은 계획을 못 지키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계획의 속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금언이다.
인생을 하나의 프로젝트라고 본다면, 젊음의 시기는 자연히 계획 수립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단계다. 하지만 프로젝트 중반까지도 계획이란 건 깨질 수밖에 없음을, 마이크 타이슨이 말한 ‘처맞는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인생이란 프로젝트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다. 디테일한 계획을 세운다 해도 저마다의 계획이 충동한다. 아내의 계획에, 회사의 방침에, 국가의 정책에, 미국의 태도 앞에서 내 계획은 무너질 수 있음을, 자메이카 게토의 주인공들이 증언해준다. 나이 마흔, 뭘 하겠다는 말보다는 뭐라도 해야 한다. 거창하고 세련된 계획을 세우느니, 차라리 퍼즐 조각 하나라도 맞추는 게 낫다. 계획 대신 몸을 움직이는 것. 계획 세우는 일을 줄이는 게 나이 마흔, 나의 계획이다.
내가 도저히 못 참아주는 놈들이, 조금만 기다리면 꼭 뭘 하겠다고 말만 지껄여대는 새끼들이야. 그래서 내가 씨발 정치인들을 안 믿는 거라고. 그 새끼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앞으로 뭘 하겠다는 말밖에 없으니까. (1권, 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