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반 다인 <비숍 살인 사건>
20대 후반이었나. 만나면 늘 대화 범위가 어제 먹은 저녁 재료 혹은 점심때 먹은 간식이나 과일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인이 있었다. 어제 마트에서 감자를 사서 쪄 먹었는데 어찌나 촉촉하던지. 요즘은 포도가 달아서 싼 거 사도 맛있다랄지. 당시 나는 니체나 푸코가 어떻고, 부르디외의 아비투스가 알튀세르의 이론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등등, 나도 말하면서 무슨 이야기 하는지 제대로 몰랐던 추상의 세계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에, 지인의 관심사가 참 한심해 보였다. 한마디로 형이상학의 세계에 머무르며 주변 사람들의 형이하학적 사고를 내려봤다고나 할까. 거만했던 허세의 시절이었다.
나이가 드니 사람이 점점 형이하학적 세계에 함몰된다. 실용적인 세상에서 형이상학적 담론은 지적 사치다. 애들을 키우다 보니, 에어 프라이어에 튀길 감자를 사고, 제철 과일 중 싸고 맛있는 걸 찾아다닌다. 내 삶을 둘러싼 문제도 늘어난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니체나 푸코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자연히 생각이 현실에 집중되는데, 그때 가끔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 우주를 생각할 때가 있다. 수억 개의 별들이 존재하는 우주의 무한함을 접하다 보면,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조금씩 사소해져, 거대한 우주의 먼지 속 티끌이 되어 사라진다. 결국 우주는 잠시 형이상학의 세계로 피할 수 있는 도피처인 셈이다.
물론 우주는 가치중립적인 공간이다. 우주를 현실 도피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무한의 공간은 치유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가늠할 수 없는 우주의 거대함은 자칫 사람을 극단의 허무에 빠트릴 수 있다. S.S 반 다인의 장편 추리 소설 <비숍 살인 사건>은 우주만 바라보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이 어떤 비극을 불러오는지 보여준다. 사실 반 다인의 추리 소설 <비숍 살인 사건>은 당대 엄청난 히트를 쳤다지만, 어려서 <소년탐정 김전일>을 읽고, 지금은 BBC의 <셜록>을 보는 내겐 조금 어설프다. 반전과 추리를 잘 담아냈지만, 정교함이 투박하다. 주인공 파일로 밴스는 나름 영특하지만, 비범함이 셜록과 김전일에 못 미친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좀 더 스마트한 왓슨 정도 되겠다.
그럼에도 <비숍 살인 사건>엔 김전일이나 셜록을 넘어서는 유식함이 있다. 파일로 밴스는 추리 실력이 조금 답답하지만, 문화 예술에 대한 조예는 물론, 스포츠, 과학을 넘나드는 르네상스적 지식으로 소설을 지적으로 풍부하게 만든다. 지적 허영을 충족시켜주는 추리 소설답게 <비숍 살인 사건>에서 범인을 찾는 핵심 단서는 ‘리만-크리스토펠 텐서 공식’이다. 바로 우주의 무한함에 대한 공식이다. 스트레스를 덜어주던 광활한 우주의 공간은 <비숍 살인 사건>의 살인마에겐 미미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부정의 징표가 된다. 지적 허영심이 넘치는 파일로 밴스는 추리 과정에서 의아할 정도로 수학과 살인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바로 여기에 범죄 동기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수학자들이 전문 분야로 삼는 영역만 봐도, 그들은 파섹이니 광년이니 하는 단위로 무한한 공간을 측정하려고 하지.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무한소의 전자를 측정하기 위해 밀리 미크론의 1백만 분의 1이라고 하는 라더포드 단위를 발명해야 하거든. 그들의 시선은 초월적인 관점을 갖고 있어. 이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과 사람들은 거의 점이 되어 사라져 버리지.’ (P.339)
거대한 우주의 관점이 인간에 대한 시각을 극단적인 냉소주의란 사디즘으로 변모시킬 때, 살인은 ‘팽팽한 두뇌활동과 감정적 억압 속에 살아야 하는 수학자가 어쩔 수 없는 배출구로 계획한 일’로 전락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형이하학적 세계의 스트레스를 잠시 해소하기 위해 형이상학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은 좋으나, 도피가 중독이 되어 형이상학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면, 다시 말해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면, 망신의 위험이 높아진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니 시대의 분위기에 역행하거나, 사람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 공감능력이 줄어드는 식이다. 가끔 언론의 지면을 장식하는 교수들의 터무니없는 사고와 그 해명을 보면, 과도한 정신 활동이 실생활에 미치는 악영향을 확인하게 된다.
플랑크톤이 인간의 세계에서 잠시 플랑크톤의 세계를 바라보면 우월감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겠지만, 한시적인 체험을 넘어서긴 힘들다. 적당한 우주적 관점은 팍팍한 일상의 쿠션이 될 수 있지만, 시선은 우주가 아닌, 우리를 끌어당기는 중력의 방향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비숍 살인 사건>은 그것이 삶의 원리라고 말한다. 어차피 지구의 중력이 사람들을 아래로 당기듯, 삶의 힘은 인간을 점점 더 형이하학적 세계로 끌어당긴다. 어제 마신 술의 숙취로 괴로워하며 하루를 보내고, 숙취에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며, 숙취에 좋은 양주를 찾아다니다 보면, 우주와 인간의 본질이라는 거대한 담론은 사라지게 된다.
결국 핵심은 그 중력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지구를 떠나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영화 <그래비티>에도 그 메시지가 분명하게 잘 나타나 있다.) 현실 감각을 잘 유지해야 한다. 예전에 술자리 분위기를 띄우던 농담이 지금은 술자리를 망치는 걸 넘어 본인의 사회적 위상을 추락시킬 수 있는 성희롱이 될 수 있음을 잘 간파해야 한다. 책을 읽어야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관심을 잃어선 안 된다. 가끔 스트레스받으면 우주를 바라보고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읽을 수 있겠다. 하지만 머리보다 몸으로 먼저 현실의 감촉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과도한 두뇌 활동으로 인한 망신을 방지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