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위로하는 방법

뮤리얼 스파크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by 알스카토
“여러 번 말했지만, 이번 여름휴가 후 난 내 전성기가 진짜로 시작되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어요. 전성기는 알아채기 쉽지 않아요. 여러분, 나이가 들면 언제 시작될지 모를 전성기를 놓치지 않고 알아챌 수 있도록 늘 신경 써야 해요. 그리고 그 시기를 완전히 누려야 하고.” (P.15-16)


라고 진 브로디 선생은 말씀하셨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전성기를 알지 못한다.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현실을 둘러보면, 아직 인생의 전성기가 오지 않은 게 확실하다고 괴로워하지만, 더 절망스러운 건 어쩌면 불만족스러운 지금이 내 인생의 전성기 일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인생의 전성기가 지나갔다고 믿는 편이 마음 편할 수도 있겠다. 때문에 뮤리얼 스파크의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에서 진 브로디 선생이 하는 확신은 독자의 불안을 자아낸다. ‘자신의 전성기가 언제인지 아는 건 중요한 일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도록.’ (P.14)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20세기 초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보수적인 학교, 마샤 블레인 여학교의 독특한 교사 진 브로디와 그녀의 학생들, 아니 무리에 관한 이야기다. 진 브로디 선생은 모니카, 유니스, 로즈, 메리, 제니 그리고 샌디를 자신의 무리로 점찍고, 그녀들을 ‘크림 중의 크림(creme de la creme; 가장 중요한 인물이란 의미의 프랑스어 표현)’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선생은 전성기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건 물론, 문화와 예술, 삶의 철학과 종교, 나아가 연애까지 가르치며, 소녀들을 브로디-화(化) 시켜나간다. 진 브로디 무리는 외부의 방해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약 7년 넘게 이어질 정도로 강한 결속력을 유지했다. 마치 한 몸처럼.


샌디는 일행을 돌아보았고 그들 모두가 브로디 선생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신이 그 목적을 위해 자신들을 창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과 그 자리에 없는 제니, 언제나 욕을 먹는 메리, 로즈, 유니스 그리고 모니카가 브로디 선생의 운명에 부수된 하나의 집체임을, 섬뜩한 찰나의 각성으로 깨달은 것이다. (P.41)


여기서 잠깐 전성기의 속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2차원의 그래프에 인생의 흐름을 그려본다면, 전성기는 그래프의 가장 높은 지점을 의미할 것이다. 즉, 전성기는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인생의 모든 시기와 비교해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말년에 삶을 되돌아볼 때 비로소 자신의 전성기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진 브로디 선생처럼 2차원의 그래프에 기준선을 긋는 방법도 있다. 절대 기준을 정한 뒤, 그 기준보다 높은 순간을 인생의 전성기로 보는 방법이다. 이 경우 전성기는 여러 번 찾아올 수 있고, 전성기의 확인도 용이하다. 물론 이 방식도 절대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란 문제가 남는다.


진 브로디 선생은 이 애매함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브로디 선생은 ‘제일 중요한 건 안전이 아니에요. 맙소사, 진리와 미(美)가 최우선이지’(P.14)라고 확신하는 사람답게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는 헤겔 주의자다. 세상의 모든 사안을 판단할 절대 진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녀는 쉽게 파시즘에 빠져들었다. 지금이야 파시스트란 말처럼 심한 욕이 없겠지만, 파시즘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던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선언문을 보면, 브로디 선생이 이해된다. 그들은 힘과 속도, 나아가 강력한 진보를 원했고, 절대 진리를 갈구하는 브로디 선생에게 파시즘은 자유의 방종과 민주주의의 혼란을 극복해줄 엘리트적 희망이었던 셈이다.


가장 위대한 화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닌, 조토라고 말하는 브로디 선생에겐 인생의 전성기를 측정할 절대 기준을 정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이 전성기에 도달했다고 믿는 순간, 그녀는 헤겔의 절대정신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이제 전성기에 도달한 브로디 선생의 생각은 비판받을 수 없다. 주변의 동료와 자신의 무리에 속하지 않은 제자들은 아둔한 삼류 인간일 뿐이다. 그렇게 자신의 전성기를 확신하는 부류들은 ‘자기비판능력’이 결여되고, 샌디의 말처럼, 선생은 죄의식의 지나친 결여로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군, 브로디 선생은 자신을 칼뱅의 하느님으로, 처음과 끝을 아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여기고 있어, 샌디는 생각했다. (P.158)


자신의 전성기를 확신하는 절대 주의자는 밉지만, 측은하진 않다. 문제는 자신의 전성기를 확신하는 태도가 연약한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한 위장술일 때 발생한다. 터무니없이 강한 자신감이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 방어적 기제에서 비롯된 것처럼. 이 경우 실제 자신의 현실이 더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전성기에 대한 믿음은 반비례해서 더욱 강력해진다. 다시 말해 현실과 인지의 간극이 더욱 커지는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는 건데, 브로디 선생이 그랬다. 학교에선 교장과 동료들의 공격에 어려움을 겪었고(사실 왕따였다), 본인의 전성기에 만나기엔 하찮다고 여겼던 연인을 다른 선생에게 빼앗겼지만, 자신의 전성기에 대한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다. 역시나 위장 전성기는 측은함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우회적인 방식으로 샌디는 브로디 선생이 그런 인물이 된 이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다른 독신 여성들처럼 술독에 빠지는 대신 이국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도취에 빠짐으로써 그토록 특이하게 스스로를 고양시키게 된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P.144)


그런 때의 브로디 선생은, 마치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진줏빛 빛줄기가 섬세하게 교차된 거리 중 하나를 비출 때 음산하고 어두운 에든버러가 갑자기 수상도시로 변하는 것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자의 어리석음이라는 흥미로운 빛을 비춰봄으로써 샌디는 브로디 선생의 당당한 착각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착각에 빠진 당시의 브로디 선생을 생각할 때보다 더 큰 애정을 그녀에게 느낀 적은 없었다. (p.146-147)


브로디 무리의 핵심이었던 샌디는 시간이 지나면서 브로디 선생의 진면모를 가장 정확하게 보았으며, 자신이 숭배하던 그 모습의 이면을 확인함으로써, 자기비판적인 면모를 갖게 됐다. 브로디 선생이 자신을 브로디-화(化) 시키려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간 샌디는 베스트셀러를 쓴 헬레나 수녀가 되어 진정한 전성기에 한걸음 다가가게 된다. 결국 위선적이거나 독선적인 인생의 전성기보단 슬럼프에 빠진 인생이 차라리 낫다. 아직 본인의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기반성 능력이 결여된 독선자이거나 자신의 현실을 감추기 위해 착각에 빠진 측은한 사람은 아니란 의미일 테니. 그것이 바로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샌디의 위로다.


헬레나 수녀님, 학창 시절 수녀님께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무엇이었나요? 문학작품이었나요, 아님 개인적인 것? 혹시 칼뱅주의자였나요?
샌디가 대답했다. “전성기에 있던 진 브로디 선생이었죠.” (P.168)


8954650155_1.jpg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뮤리얼 스파크/ 서정은 역/ 문학동네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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