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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Nov 22. 2020

미식과 취향의 사회학 소고



1.
요사이 나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식에 필요 이상으로 열광하는 까닭은 아마 미식이라는 취미가 자신의 고급 취향을 드러내주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유효하다는 것은 곧 고급 취향을 과시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 중 그나마 가장 싸게 먹히고, 별다른 지적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즉 허들이 낮아졌다는 이야기다. 과거엔 미식이 상류층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지금은 노가다를 뛰어도 다른 소비를 줄이면 그럴듯한 사케에 주1 오마카세 정도는 가능하지 않나.

그러니까 미슐랭탐방이나 스시스타그램에 몰두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순전히 탐미적이고 유희적인 개인적 동기로만 그 짓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낮다는 이야기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열정적 추구가 전부라면 세상에 떡볶이그램 순대국TV도 스시나 파인다이닝만큼 흔히 발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 정치적 의도가 없는 순수한 즐거움의 탐닉이나 단순 오덕질이라면 그만큼의 일관성과 집단성, 개방성과 과시성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보통의 먹방이나 먹스타그램하고는 행위동기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일종의 인정투쟁이다.

하물며 "어디를 가봤다" 혹은 "어떤 유명 셰프와 이만큼 친하다" 따위의 사실이 강력한 준거적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점, 그 권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비판의 기준과 자질이 정해지는 점 등을 보면 과거엔 특정 계층이 전유하였던 일련의 문화체계가 지금은 모든 대중의 미학으로, 소위 정치적 환속화된 체계로서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평등이나 해방과는 관계가 없으며, 감성을 분할하는 주체 및 그 작동 원리는 그대로인 채 단지 권력의 축만 다원화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요즘은 차라리 모든 것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먹방이 가장 감각적이고 포스트모던한 미식 행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철저히 반지성적이고 무비판적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가장 탈정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불닭볶음면 5개를 허버버 원샷때리는 먹방 유튜버들은 그야말로 '해방된 관객'이자 새로운 패러다임 그 자체이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농담이다. 광고주의 개나 서커스로 전락하는 것은 해방도 세속화도 아닌 최악의 천박화다.

2.
관찰의 범위를 취향 일반으로 확장해 생각해보자.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이 "보세요! 내 취향은 이렇게 고급입니다"하며 SNS에 업로드하는 대부분의 장면들이 그 사람의 실제 체화된 취향을 보여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돈이 많든 적든, 남들에게 빠짐 없이 알려지고 보여져야만 행복하다면 그것은 취향이 아니고 선망이다. 자연스러운 자기 삶의 형식과 괴리되어 있는, 소비를 통해 소유하고는 있지만 인식론적으로는 허구에 가까운 무엇이다.

이러한 선망은 행복이나 사랑 같은 추상적인 것들에 비해 매우 구체적이고 형태가 뚜렷한 상을 갖고 있는데, 앞서 말했듯 선망의 대상이 계급적으로 구조화되며 여러 매체를 통해 정치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SNS는 개인의 선망이 투사된 창이며, 누군가의 SNS가 충족된 균형 상태나 자족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애초에 충족된 삶은 그렇게 분투하듯 취향을 뿜어대지 않는다.

이러한 상승을 추구하는 소시민들의 선망과 현타(?)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는 조르주 페렉의 소설 <사물들>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안락한 가운데 미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들은 목청을 높이며 감탄하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자가 아니라는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 몸에 배서 너무나 당연한 것, 몸의 행복에 따르기 마련인, 드러나지 않고 내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그들에게 부족했다. 그들의 즐거움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었다.'



3.
사람들이 취향을 왜 그렇게 드러내려 애쓰는지, 목청껏 감탄하거나 비판하곤 하는지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은 부르디외가 이미 제공했다. 구별짓기다. 그러나 부르디외의 이론은 널리 알려진 만큼 오용이 많아 개념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부르디외가 말한 구별짓는 권력으로써의 취향이란 일부러 과시하는 게 아니라 타고난 삶을 통해 '체화'된,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 즉 아비투스다. <구별짓기>는 사회적 상호작용에서의 아비투스의 기능과 의미작용 등에 관한 책이며, 요란스레 떠들어대는 취향은 오히려 소시민이나 하류 계층의 행위성에 가깝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별짓기 위해 드러내는 취향은 유효타를 내지 못하며 자기 계급을 폭로하는 기능만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선망하고 모방하려 할수록 기존의 권력구조가 더욱 강화되는 작용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돈만큼 얻기 힘든 게 취향을 비롯한 상징자본인데, '상징'자본이므로 기본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 내에서만 자본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그 상호작용이란 게 어떤 경우에도 수평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법은 없고, 자본을 전유한 이들은 자본을 쉽게 내어줄 생각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차라리 그것을 영원히 추구하고 선망하도록 온갖 장치로써 구조를 재구성하고 불평등을 은폐한다. 다시 <사물들>을 인용하면,

'그들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갈망하는 것은 어떤 법칙에 가까웠다.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법칙이었고, 광고, 잡지, 진열장, 거리의 볼거리, 소위 문화 상품이라 불리는 총체가 이 법칙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있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상징권력을 실증과 논증을 통하여 소상히 밝혀 그로써 재생산되는 구조적 불평등을 고발하고자 하였던 사회학자지, "취향이 곧 계급이니 취향을 갈고닦아 고급인간이 되라"는 엉뚱한 소리를 한 적은 없다. 사람들이 후자의 길을 택해 <사물들>의 제롬과 실비처럼 스스로 얼간이로 전락하는 게 부르디외 탓은 아니다.

구조와 주체의 화해고 뭐고 일단 그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진실을 알게 되면 누구라도 이전처럼 살고 싶지 않아지는 법이고, 부르디외 정도만 제대로 공부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달라진다. 진짜다.

4.
상승을 위한 인정투쟁과 실패를 그린 다른 문학 작품으로는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개츠비는 돈도 많이 벌었지만 말투 하나를 못 고쳐 진퉁 금수저 뷰캐넌에게 무시당한다. 그래도 개츠비가 문학인 까닭은 그 치열한 투쟁의 목표가 오직 사랑이었기 때문인데, 물신을 숭배하고 소유하는 것만이 목표인 투쟁은 그저 좀스러울 뿐이다.

거리의 철학자 에릭 호퍼의 말처럼, 집단적 자부심은 흔해도 집단적 수치심이란 찾아보기 어렵다. 딛고 선 토대가 불안하면 사람은 성찰하기보다는 무리짓는다. 함께 찬탄하고 냉소하며 내 취향의 고상함을 매일 재확인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삶도 있는 것이다. 취향으로만 뭉친 집단은 대개 그렇다. 스스로 규정한 고급인간이라는 불확정적 지위, 그 존재론적 불안을 상호확증으로 덮어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스타일이 멋져! 우리는 고상해! 우린 입맛이 특별해!

취향을 매개로 가치관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서로의 취향을 상호 정당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연결고리인 피상적 관계에 의존하는 것은 비슷해 보여도 질적으로는 천지차이다. 특히 돈 문제가 결부되면 공허한 본질이 확 드러난다. 이거 꽤 심각한 존재론적 문제인데 사람들은 뭐든 깊이 생각하지 않기에 그냥 그렇게 서로 떠받치며 산다. 욕망에 소진당해 삶의 다른 가치나 의미는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선망만 하다 끝나 버리는 노예 같은 삶, 허무하고 얼간이 같지 않은가?



5.
구조 이야기를 길게 하였으니 주체에 관한 짤막한 사유로 이 자해성 쪽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응시하고자 하는 것은 구조 그 자체라기보다는 구조를 재생산하는 그 안의 주체들의 행위성, 특히 그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는 정치와 윤리의 미학적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주체에게 있어 취향의 기능과 의미는 어떠하며, 어떠해야 할 것인지 고민한다. 취향은 상징폭력이나 허세일 수밖에는 없는가. 이 지점에서 나는 자연스레 짐멜과 푸코를 떠올린다.

주체의 정체성이란 감춰진 것, 찾아내야 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정체성은 넓은 의미의 자기인식을 의미한다. 사람이 태어나 외부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반응하여 상호작용하는 것으로부터 자기인식은 시작되며, 이것을 만들어간다는 건 외계 일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자기 자신에게 변형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세계의 불화로부터 저항의 사유가 시작된다. 이 관점에서 취향이란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해주는 행위 양식 일체를 의미하게 되며, 자유로운 주체의 자기배려, 자기기술 행위로서의 취향은 미학적 자기인식으로써 해방의 가능성이다.

따라서 취향을 계급적으로 정형화된 특정한 소비 행위의 학습으로 정의하는 것이 잘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문화적 산물들을 가격 순으로 나열해 놓고 깜냥에 맞게 하나씩 소비하고 경험하며 나는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 탐색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는데 앞서 말했듯 이는 정체성 형성이나 자기인식을 오히려 방해한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미성숙한 사람이 취향만큼은 고급인 경우는 흔한데, 취향이 상징자본으로만 기능할 때의 자연스러운 불일치다.

미학적 자기인식을 통해 도처에 숨은 불편한 진실들을 찾아내 직시하고, 당연하다 여기던 삶의 어떤 안락함이 더 이상 당연해지지 않게 되는 것, 나는 이러한 직시와 변형의 과정을 혁명이라 부른다. 이러한 노력은 반자본주의 시위에 나간다거나 종교/뉴에이지/히피즘 따위에 경도되는 것보다 더 정치적이고, 고급 취향을 갈고닦는 것 따위보다 더 미학적이다. 정확히는 전자들은 애초에 정치나 미학이 아니라 실천성을 가장한 일종의 포기이며, 권력의 주체만 다를 뿐 똑같은 예속이다.

이는 내가 삶을 살아나가는 방식과 태도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혁명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얼간이처럼 살지 않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 고급 제품을 소비하는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지만, 거기에 매몰되면 얼간이가 된다. 단순한 비판 능력의 유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 그야말로 '실존의 미학'에 관한 심층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사유와 담론을 비웃으며 현실의 삶이나 충실히 잘 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과 유리된 뜬구름 같은 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만과 불편한 진실이 도처에 숨어있듯, 사유와 저항의 가능성 역시 도처의 현실에 존재한다. 그들이 말하는 건강한 현대인이라는 것,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답습한다는 것은 곧 어떤 부재, 억압, 소외를 발판삼아 세워진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선망과 끝 없는 탐욕만이 남는다. 미학적 인식이 부재한 삶은 그런 삶이다. 나는 그런 삶으로부터, 그런 삶의 강요로부터 이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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