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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Nov 22. 2020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말같은 말을 하고 생각같은 생각을 하려면 달리 다른 수가 없다. 끊임ᆹ이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읽어야만 사유할 수 있고 사유해야만 주체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 한편, <지적 대화를 위한 얕고 넓은 지식>류의 가벼운 시대정신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소위 위키세대의 표상이다. 모두가 값싸고 편리한 방법으로 보기 좋게 정된 모든 지식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데, 원래 그 지식을 얻으려면 거쳐야 했던 모든 지적 사유 과정이 생략된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슈퍼마켓에서 장바구니에 식료품을 담듯 지식을 쇼핑할 수 있는, 요컨대 '위키화'된 사회는 모든 진리나 지식, 미와 같은 것들의 가치에 대해 일종의 냉소주의적 태도를 주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지적'이라는 수사도 본의와 상당히 다른 개념으로 통요ᅬ고 있고, 지식의 의미도 많이 달라졌다. 현대의 지식이란 탈신비화, 탈중심화된 무엇으로 여겨지며, 대중에 의해서 생산, 소비되는 재화로 여겨진다그럴수록 더더욱 학에 침잠하고 이론에 매몰되어야 하는, 그럼으로써 세상에 기여할 수 있어지는 학자들조차 차라리 '얕고 넓은 지식'의 공급자로 태세를 전환한다. 강신주 같은 사람들을 두고 ᅳᆫ 이야기다. 학문의 장에 충실하는 방식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혹은 시대정신의 수요에 유혹을 느낀 학자들은 그렇게 생활인도 학자도 아닌 애매한 존재가 되어 위키화를 더욱 부채질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유희적 수단으로만 소비되게 되었고, 사람들은 소위 '침잠하는 삶'에 더 이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아니오히려 ᅢᆼ소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이미 죽은 사람들 책 읽어서 어디다 쓰냐고 의아해 한다. 당장의 쓸모가 없다면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니체의 저서에서 미치광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게 무슨 유레카와 같은 외침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탄식이고 절규에 가까웠다. 합리성이 지배하는 세계, 합리성이 비합리성을 구축하는 세계, 탈가치화되는 세계, 기든스 같은 ᅡᆨ관적이고 적극적인 학자들은 그러한 흐름에서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지만, 니체는 실존의 급속한 쇠락을 예감했다. 그 쇠락이 무슨 생태주의자들이나 급진적 자본주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쇠락과는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가치의 몰락에 대한 우려는 니체 혼자만의 고통은 아니었다. "우리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민 역시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의 회화는 어떻게 될 ᆺ인가? 학문은? 예술은? 진리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과 제도의 동학이며, 위키화라는 것은 미와 진리 역시 물적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긍정적 기대가 널리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관념이 물적 조건들이 영구화 또는 재분배되는 동력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 돈이라는 수단이 다른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에 대해 갖는 연결성, 연관성은 점점 더 긴밀해지고 있고, 제도를 통한 변화 역시 너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얕고 넓은 지식을 소비하고 또 계속해서 수요하는 것, 이러한 위키세대적 시대정신은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한 현상은 아니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관념 문제로 귀인할 수는 없는 법이다. 미와 진리의 위키화, 즉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물화'는 소위 물적 조건들이 인간의 본능, 욕망과 너무나도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인간 존재가 질적으로 아예 변혁되지 않는 한 그 결합이 전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며, 또한 욕망의 일반적 속성으로서 사람들은 모든 것이 고갈되더라도 '하나 더'를 욕망한다그래서 굳이 맑시즘이 아니더라도 물화는 종종 소외와 같은 의미로 읽힌다. 이러한 본원적 원리 하에서 완전한 주체성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주체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선'에서 안분지족할 수 있는,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갖춘 사람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비교적 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생존의 문제와 생활의 문제를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물적 추구와 그 외의 추구를 구분하고, 합과 비합 둘 다를 좇을 수 있는 사람이다즉속된 말로 '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실존양식과 물질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어느 정도 충분한 품위유지와 생활의 안정이 전제되면 그 지점부터는 물질 이상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비교적 주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정도 물질이 갖춰진다면 물질적 요구와 거리를 둘 수 있는 힘, 그 힘을 나는 주체성 혹은 지혜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그 안분지족하는 지혜는 아마 훈련을 통해 자각되고 강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훈련이란 바로 물질 외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것에 몰두하는 노력이다. 위키화된 것 말고, 진정한 무언가에 대한 욕구를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소위 인간성이니 실존이니 하는 것들의 실마리를 다시금 발견할 수 있다내가 책을 보고 글을 쓰고 그림을 보고 하는 것은 그래서 꼭 웰빙만은 아닌 것이다. 나는 내게 가해지는 통념상의 비판들에 대해 나름 정당화할 수 있는 언어들을 갖고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용기는 먼저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생겨날 수 있다그런 점에서 빈곤은 존재 최악의 비극이며 가장 강력한 구조적 제약이다. 객관적 조건들이 결핍되면 그 어떤 가치지향적 추구도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한편 제도권 교육과정에 충실하며 넓고 얕은 지식을 최대한 긁어모으면 그 빈곤으로부터 가장 빠르게 탈출할 수 있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생존의 문제, 생활의 위협에 직면한 사람들이 진리와 미에 대해 냉소주의적 태도를 갖는 것은 그래서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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