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사티의 유일한 연인이었던 여류 화가 겸 모델 쉬잔 발라동이 그린 사티의 초상화(1892).
너무 예민하고 고독한 사람에겐 봄날 따스한 미풍의 어루만짐조차 거인이 휘두르는 주먹질 같을 것이다. 인생은 고통이고 난잡한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없다.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던, 포스트모던 예술가 에릭 사티의 이야기다.
미술비평가 할 포스터는 주저 <반(反)미학>에서 모더니티를 도달점이나 종결이 아닌 미완성의 기획으로 보고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시작한다. 그의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사조나 패러다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설명적, 기술적 용어이며, 모더니즘과의 단절-반작용-을 의미하는 동시에 또한 모더니즘의 메타적인 변용이다. 메타적 변용과 반작용, 이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포화 상태가 될 때, 모더니즘의 새로움이 모두 소진된 시점에, 하나의 사건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시작된다. 미술에서의 뒤샹 그리고 다다이즘과 같이, 그리고 그조차 식상해진 지금 홀연히 등장한 티노 세갈과 같이, 사유의 패러다임과 예술가의 역할 모델을 완전히 바꿔 놓는 사건이 필요한 것이다. 음악에서 그 사건은 바로 에릭 사티였다.
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베토벤은 영원한 현대성이다. 베토벤은 영원히 식상해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 계보를 잇는 창작자들이 맞닥뜨릴 고민이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창작할 것인가? 거의 모든 현대음악은 베토벤의 (이념적)계보를 잇고 있으며, 난해하기 그지없는 음렬주의나 무조 음악조차 예술로서의 음악에 관한 기존의 미학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대성이라는 범주에 철저히 포섭되어 있다. 형식의 진화와 확장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노력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이러한 고민들이 모여 담론을 형성하고, 담론은 현상과 실재에 대한 메타인지를 가능하게 하며,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일련의 현대성에 대한 메타적 반작용-그러한 운동 일체를 일컫는데, 요컨대 기존의 미학적 세계관, 예술의 조건과 의미와 기능에 관한 관념 일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을 뜻한다. 따라서 형식의 파격이 곧 포스트모던은 아니다. 사티는 기존 음악의 형식 뿐 아니라, 형식을 둘러싼 아비투스 일체, 음악이라는 예술에 관한 종래의 지도적, 낭만적, 고전적 도식을 모두 거부하였으며 그것을 하나의 독창성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 음악의 시작인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집중하여 들어야 하는 고차원적이고 지적인 음악이라 여겨져 왔다. 전 인류의 정신이 일시에 고양되거나 동물 수준으로 몰락하지 않는 한,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사티는 자신의 음악을 '가구 음악(Musique d'ameublement)'이라 칭하고, 연주회에서 청중에게 '절대 집중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창작자 뿐 아니라 청취자의 태도와 관습까지 기존과는 달라야 했다. 즉 사티는 처음부터 반골이었다. 후기낭만주의 시대의 형식 과잉, 포화 상태,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적 요구 일체와 단절을 선언하고 고전 이전의 고전으로 돌아간 사티는, 화성과 대위법이 발견되기 이전의 중세 교회 선법을 다시 끄집어내 가장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3개의 짐노페디, 6개의 그노시엔느와 같은 곡들인데, 영지주의와 신비주의에 심취하였던 젊은 시절의 작품들이다. 이 초기 음악들은 뉴에이지와 미니멀리즘의 시초로 여겨지며, 드뷔시와 라벨에게도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당시 사티는 괴짜였고 급진적이었지만, 아직 세상 모두와 철저히 불화하지는 않았으며 매우 활동적이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난 뒤 사티는 특유의 냉소와 풍자, 패러디로 점철된 곡들을 연달아 발표하는데, 그 제목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바싹 마른 태아>,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관료적인 소나티네(클레멘티의 소나티네를 패러디한 이것은 거의 당대의 펑크 음악이라 할만하다)>, <속되고 즉각적인 시간>, 그리고 <벡사시옹(짜증)> 등.
서른 이후의 사티는 베토벤이 음악 일반에 심어놓은 일련의 정신성, 목적론적이고 숭고해야만 하는 어떤 것, 하나의 고유한 진리 절차로서의 음악-그 가능성과 의미 일체를 냉소하기 시작한다. 냉소가 개인의 성격을 넘어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 그 자체가 되어간 것이다. 이러한 전회의 계기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 쉬잔 발라동과의 결별일 것이라 추측한다. 실존을 뒤흔든 상실의 경험, 불행으로 가득찬 세계, 아무 가치도 없는 예술, 멍청하고 천박한 사람들, 이 무렵 사티에게 음악이란 그냥 쉬는 들숨과 날숨처럼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이었다.
요컨대 사티의 후기 음악들은 앞의 초기 작품들과는 스타일도 창작 의도도 판이하게 다른데, 전반적으로 허무주의가 근간이 되며 음악에서 일체의 감성적인 요소를 내다버렸다고 평가된다. 당대에는 쓰레기라는 혹평도 심심찮게 들었다. 주변의 권유(?)에 못 이겨 스콜라 칸토룸에 마흔 살 만학도로 입학하여 정통 화성과 엄격한 대위법을 성공적으로 공부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에게 음악은 냉소의 언어, 불화의 언어였다. 고전적 작법을 훈련해 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을 개척하고자 노력하는 건 모더니즘 작곡가의 낡은 태도이지 사티와는 무관했던 것이다. 이 즈음 사티는 오랜 벗 드뷔시와도 절연하고, 점점 더 고립되고 가난해진다. 사람의 빈 자리를 알콜이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간경변에 시달리던 사티는 1925년 여름 59세의 나이로 외롭게 사망한다. 그는 냉소적이지만 따뜻하고, 외롭지만 유머러스한 사람이었기에 장례식에는 긴 조문 행렬이 함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백여 년이 흘렀다. 많은 음악들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살아남은 음악들은 현대의 고전이 되었다. 드뷔시와 라벨은 클래식 음악이라는 기존의 깐깐한 범주 안에 자그마한 방 한 칸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티의 음악은 모든 포스트모던 문화 일반에서 여전히 유효한 현재성이다. 대부분의 인디 음악가들, 사카모토 류이치, 브라이언 이노, 존 케이지, 필립 글래스, 그 외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티의 음악적 '반미학'을 분유하고 있다. 사티가 선언한 그 단절의 지점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새로운 시작들이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요컨대 드뷔시는 사조이나, 사티는 사건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대중들은 사티를 아예 모르거나, 시몬스침대 광고 BGM(짐노페디 1번)을 작곡한, 대충 뉴에이지 비스무리한 뭔가의 작곡가 정도로만 알고 있다. 어지간한 애호가들조차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불운의 천재'따위의 낭만적 도식으로 사티를 소비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사티의 고독과 예민함, 가난과 반골 기질, 냉소로 점철된 불행한 삶이 낭만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기 때문일까. 그러나 사티는 천재도 아니었고 생전에 그럭저럭 인정도 받았으며, 가난은 막가파스러운 생활 패턴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역사상 가장 반(反)낭만주의적인 음악가였다. 따라서 바흐나 베토벤, 슈만과 쇼팽, 라흐마니노프나 프로코피에프를 듣던 진중함으로 사티에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아방가르드나 다다이즘 같은 사조로 사티의 음악을 구분지으려 시도할 필요도 없다.
다만 어느 날 이제까지 경탄하며 듣던 위대한 음악들이 문득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 혹은 피로에 찌들어 뭔가 집중해서 음미하며 들을 힘조차 없는 날, 아무 잔에 아무 술이나 한 잔 가득 따른 뒤, 알도 치콜리니 혹은 라인베르트 데 레우가 연주한 사티의 피아노 소품집을 꺼내들어 보자. 방에 놓인 소파나 옷장을 힐끗 보듯, 아무런 목적 없이, 어떤 효용도 기대하지 말고, 그 무심성(Disinterestedness)의 행간(Stanza)에 불협화음처럼 몸을 맡겨 보자. 먼지가 방 안을 부유하듯, 집중하지 말고 알콜과 함께 그냥 흘려들어 보자. 단지 그뿐이면 정말로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