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fe with Fugue Nov 24. 2020

진보와 혁명의 미학

* 글은  개인과 사회의 물적 토대가 충분히 견고하다는 전제 하에 작성되었습니다. 북한 인민이나 소말리아 해적들한테 정신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세끼   먹고 잉여자원 넘쳐나면서도 여전히 플라나리아처럼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 혁명적인 순간이 있다면 바로 내가 얼마나 별로인지, 속된 말로 얼마나 '후진지' 자각하는 순간이다. 나의 후진 모습이 타자의 객관화된 시선으로 깨달아지는 순간이 즐거울 사람이 있겠는가? 따라서  순간에 수반되는 강렬한 불쾌는 곧바로 개선의지  실천으로 이어지기 쉽고, 아직 밝혀내지 못했을 뿐이지 나의 후짐이  하나뿐일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면 바퀴벌레 박멸하듯 계속해서 집중과 발견 그리고 개선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걸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나름의 내적 규범, 윤리적 기준, 성숙한 가치관 따위가 만들어진다.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소위 진보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도식을 따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아진다는 것은 전에 없던 새로운 상태로 즉시 도약하는  아니라, 전에 모르던 후진 부분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제거해 나가는 점진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진보란, 내가 심미적으로 적대시하는 무엇이  안에도 있음을 발견하고 분할해 나가는 '감각적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마다 사물을 수용하는 고유한 관점,  의견(doxa) 생겨나며, 각자의 의견이 다양한 장에서 발화되고 경합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모든 정치적인 것은 불화로부터 시작되며 불화란 결국 미학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정치적 진보는 쾌와 불쾌의 변증법이자 영원히 도달될  없는 여러 지향점들을 향한 다발적인 운동이며, 다수결 편가르기 만장일치 합의 같은 전체주의적 환상과는 거리가 (어야 ). 정치란 통념처럼 그저 '참여'하는 것에 그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위의 도식처럼 보다 존재론적이면서 관계론적인 것이기에, 진보라는  흔히 생각하듯 백만명 천만명이 한마음 한뜻으로 촛불 들고 나와 나랏님 갈아치우고 누구 감옥 보내고 하는  따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체질의 개선이 아닌, 단지 메스로 암세포를 잘라내는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으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일  혁명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감각의 마비' 대해 기술한  있다. 사회라는 것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할 능력이 없다면 사회구조에 대해 그리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대로인 사람이 단지 어떤 흐름에 투신한다고 해서 세상이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졌다는 환상만 가져다줄 뿐이다. 어떤 숭고한 정치적 이상을 가졌든, 매일매일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 철구 보이루 빠끄 펭수 멱따는 소리 힐링책이나 들여다보며 시간을 허비하고 자빠졌으면 뭔놈의 혁명적 순간이 선물처럼 찾아올 가능성은 아예 제로라는 이야기다. 하물며 정치라고 그러하겠는가? 어제와 같은 오늘의 당신에게 내일의 진보란 없다.


마이클 잭슨의 <Man in the mirror>, 그 주옥같은 진리의 가사를 다시금 곱씹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If you wanna make the world a better place, take a look at yourself and make a change!"


작가의 이전글 MBTI 유행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