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그가 뭘 좋아하고 왜 좋아하는지 뿐 아니라, 싫어하는 것들을 대하는 태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방식까지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파르티타, 토카타, 인벤션과 신포니아와 같은 곡들은 호불호만 갈릴 뿐 이미 이론의 여지가 없는 거장의 명연주다. 그러나 모차르트라면 어떨까? 굴드가 연주한 모차르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그 연주는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피터 F. 오스왈드가 펴낸 글렌 굴드 평전,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이라는 책이 재미있다. 그는 글렌 굴드의 절친한 지인이자 정신과 의사로서 알려져 있는데, 상당히 객관적이고 또 밀접한 시선으로, 대중에 의해 낭만화되고 우상화된 이미지 이면에 존재하는 굴드의 내면과 충동, 의도와 성격 등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굴드의 친구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무조건 추켜세우지 않고, 나름의 주관과 관찰에 입각한 비판을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오스왈드는 굴드의 모차르트 연주에 대하여 '음악에 대한 모독'이라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하는데, 대략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굴드의 모차르트에 대한 양가적 감정(저항심과 숭배), 공공연히 모차르트를 형편없다고 주장하면서도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했고 또 즐겨 연주했다는 점 등을 들며, 굴드가 의도적으로, 공격적인 의도를 가지고 모차르트를 훼손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고 말한다. 나는 오스왈드만큼 굴드를 잘 알지 못하는 일개 청취자에 불구하니, 뭐 그랬나보다 하지만, 난 양가적 감정이니 애증이니를 떠나서 음악 그 자체로 굴드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좋아한다. 특히 <터키 행진곡>으로 유명한 11번 소나타(K.331)의 3악장, Rondo Alla Turca: Allegretto를 가장 사랑하고 즐겨 듣는데, 이 녹음만큼 굴드라는 음악가를 깊이 이해하는 데 유용한 교재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켐프나 바렌보임 등의 정석적인 연주를 먼저 듣고 나서 비교시음하듯 굴드의 연주를 들으면, 시작부터 헛웃음이 나올 것이다. 피아노곡에서 싸우자는 듯한, 시비 거는 듯한 인상을 받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모차르트 소나타 하면 (통념적으로)생각나는 명랑함과 즐거움, 빠른 장조 음악의 경쾌함, 유려한 레가토 같은 일체의 정서를 완전히 탈색시켜 버리고, 딱딱하고 차갑게 분해된 스타카토의 중첩만을 남겨놓았다. '알레그레토'라는 작곡가의 지시를 비웃기라도 하듯 매우 느린 템포로, 단순 화음조차 뚜렷하게 분리된 아르페지오로 드르륵 드르륵 분필로 칠판 긁듯이 연주한다. 뚜렷하다 못해 결벽증적인 아티큘레이션, 왼손의 반주와 오른손의 선율을 완전히 다른 감촉과 색채로 해체하고, 끊임없이 서로 다투고 화해하며 헤어졌다 합쳐지는 대위법적 해석(이걸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을 때려박았다. 제멋대로의 셈여림과 허밍은 이쯤되면 당연한 옵션이다. 굴드가 어떤 기분과 의도로 연주했는지는 몰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이 연주에서 대단한 해방의 가능성, 음악이라는 체계의 존재론적 전환을 촉발할만한 전복적인 힘이 느껴지기에, 매우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에게 통념처럼 내재된 '좋은 음악'의 개념과 그 정치성, 편견과 통념, 사회구조적으로 내면화된 일루지오에 대한 공격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대체 좋은 음악이란 뭘까? 클래식은 늘 원본에 충실하고 엄격해야만 좋은 음악일 수 있을까?
대중문화의 유사 개별화와 획일화라는 성질을 강조한 아도르노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대중문화의 저급함과 기만성을 비판하며 클래식의 우월함을 논한다. 클래식 음악을 향유하는데는 상당한 지적 능력과 감수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우월하며, 육체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 고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당위적 차원에서 더 가치 있고, 음악 그 자체로도 더 심미적이기 때문에 좋은 음악이라는 것인데, 당연히 이것은 상당히 편협한 생각이며, 무엇보다 그런 문화의 향유가 정신의 고귀화로 곧바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를 보라. 굴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만의 논리와 철학으로 음악에 가치를 재분배한다. 수직적 하이어라키를 부수고 전에 없던 준거와 관점을 제시한다. 요컨대 굴드의 모차르트 연주는 사회문화적으로 펑크 록이나 프로그레시브 록과 유사하게 작용한다. 충격을 주고 통념을 깬다. 해체되는 음들과 함께 권위도 박살났다. 요새는 정말 앞뒤 꽉 막힌 꼰대들이나 굴드를 불편해하며, 클래식 시장도 팝 아이돌 팬덤과 유사하게 재편된 지 오래다. 이러한 '세속화'가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고인 물로 썩는 것보다는 더 혁명적인 길 아닐까? 한편 자타가 공인하는 호모포니 극혐론자이자 폴리포니 신봉자인 굴드가 생각하는 좋은 음악이란 개별 음들의 나열이나 단순 합을 초월한, 일종의 창발(Emerge)된 체계일 것이다. 이는 음악을 다시 개별 요소들로 재분해하여 환원할 수 없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복잡도의 측면에서 단지 악보 안에 얼마나 많은 음들을 때려넣고 연주해낼수 있는지만을 가늠하는 비르투오조적인 관점의 편협함을 초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굴드에게 복잡도란 미칠듯한 속주와 정확한 타건, 화려한 기교와 루바토 같은 기술적 차원의 무엇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아노학원 초딩도 능히 연주하는 바흐의 인벤션, 그 단순한 구조의 쉬운 멜로디들이 대위법이라는 음악적 언어를 통해 중첩되며 만들어내는 지속적 밀도와 건축학적 구조감, 거기서 창발되는 음악의 본원적인 아름다움을 굴드는 평생 추구했다. 이렇듯 굴드의 연주는 언제나 철학적 토대로부터 시작했고, 음악의 본질과 존재의 근원이 맞닿아 있다는 믿음 하에 이윽고 사라져 버릴 음들, 끝나 버릴 연주들, 그 부존재를 포획하여 존재의 징후를 밝히고자(Enlightening) 하였다. 굴드가 피아노를 선택한 건 고립적으로 폴리포니를 구현해낼 수 있어서이지 딱히 피아노를 특별히 사랑해서는 아니었다.(굴드가 팔이 8개였다면 필시 홀로 현악4중주를 연주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리하면, 역사상 가장 정신적이고 개념적인 연주자가, 일관성 있는 자기 고집과 논리대로 모차르트를 연주했는데, 의도했든 안했든 마치 애초부터 파괴적 충동과 야성으로 탄생한 로큰롤처럼 기존의 통념을 깨부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효력이 발생했다. 이 우연적 도식이 나는 너무나 예술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클래식 음악 역사상 피아니즘으로써 이러한 전복적 기능을 수행한 연주자는 내 일천한 지식범위 안에선 굴드밖에 떠오르질 않는다. 요컨대 내가 굴드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의 감각과 음색만을 애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열을 떠나 다른 모든 피아니스트들에 대해 굴드가 갖는 변별성, 그 고유한 임의성이 갖는 필연성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경우에 대해 항상 참인 아래의 격언은, 스위스 고급 시계 브랜드 '오데마 피게'의 슬로건이다. 이것이 내가 굴드라는 음악가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역사와 전통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내맘대로 피아니즘'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To break the rules, You must first master t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