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3화. 그들이 남긴 것은

LeadXer, 리덱서 ; 대전환을 이끄는 자들

by 전하진

지윤의 아버지 김태호는 오랜만에 대학 동기 셋과 만났다.
상범은 퇴직 후 자영업을 시작했고,
영호는 아직 대기업 고문으로 남아 있었고,
기현은 환경운동을 접고 시골에서 텃밭을 일군다고 했다.


삼겹살이 지글지글 잘 익어가는 테이블.
소주잔이 몇 번 돌고 나서야, 굳었던 표정들이 조금씩 풀렸다.


“너희 딸은 요즘 뭐 하냐?” 상범이 물었다.


김태호는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지윤이… 아직 취업 준비 중이야.”


“그 녀석 참 똑똑했잖아. 서울대 나왔잖아?”
“환경공학 전공했지.”
“요즘 잘 나간다며?”
“글쎄… 쉽지 않더라고.”


잠시, 테이블 위에 정적이 흘렀다.


“우리 땐 말이야, ‘먹고 살기’가 우선이었지.”
영호가 먼저 입을 뗐다.


“맞아. 우린 그냥 주어진 길을 달렸어.”
상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현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근데 우리 베이비붐 세대, 정말 독특한 세대야.

농업화, 산업화, 정보화, 디지털화…
모든 전환기를 몸으로 극복해낸 유일한 세대지.
아마 전 세계를 다 뒤져도 이런 세대는 만날 수 가 없을거야.”


영호가 맞장구쳤다.
“선진국 또래들은 출발선이 달랐어. 가난을 몰라.
후진국은 너무 늦게 시작해서 아직도 디지털에 적응 못 하고 있고.”


기현은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식들한테 할 말이 많은 것도 당연해.
진짜 치열했으니까.
근데 지금 아이들은 중진국, 선진국의 조건에서 태어난 세대야.
우리가 겪은 과거를 그대로 강요할 순 없지.”


“그렇다고 지금 애들처럼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 게 정상은 아니지.”
상범이 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상 무너진 거 아니잖아.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냐고.
우린 밥 굶으면서도 버텼어.”


기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상범아, 지금 아이들은…
그 무너진 세상의 잔해 속에 있다고 느끼는 걸지도 몰라.
우리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였지.
그런데 그 결과가, 지금은 오히려 그들 앞에 장애물이 되어버린 걸 수도 있어.”


상범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긴…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말이야, 우리처럼 고난을 통과한 세대가 또 있냐?
우린 살아남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어 냈잖아.
그 결과가 기후위기고, 인공지능이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는 소주잔을 들어 흔들며 말했다.
“어찌 됐든 간에, 우린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
아이들이 그걸 인정 해 주지 못하면 … 섭섭하지.”


영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어렸을 때 세상이 이 정도로 변할 줄 누가 알았겠냐.
어찌 되었건 간에 그만큼 만들어 내는거잖아.
그런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너무 나약해.


그나저나 이런 상황을 물려주는 게 문제라면
아직 남은 힘을 다해 다시 뛰어야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
우리 세대가 제대로 된 세상을 물려줘야
우리의 치열했던 삶도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그 순간, 기현은 소주 한 잔을 벌컥 들이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회색빛 도심 속, 나무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나무는 한 세기를 넘게 같은 자리에 서서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그늘을 만들며,
가을이면 잎을 떨구고, 겨울이면 고요 속에 들어갔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말이야 인류는 무엇을 향해 이리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건지

가끔 무척 궁금해 했었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농업화, 산업화, 정보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잖아
가끔은 그런 인간들이 참 놀라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종은 태어나서 먹고, 자고, 싸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자연에 기여하고 돌아가는데

.
근데 유독 인간만… 뭔가를 창조하고, 만들어내고,
또 거기서 끊임없이 확장해 가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그 창조가 자연을 위한 게 아니라,
결국 인간만을 위한 거였단 말이지.

그리고는 결국 기후위기 등 지금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거 아닐까?"

잠시 정적.

그의 말은 낯설었지만, 친구들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기현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인공지능까지 만들어냈어
앞으로 모든 기계의 지능이 인간 이상으로 업그레이드가 되면

그 때 세상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 될거야
어느 날 갑자기 자동차, 서빙로봇이, 아니면 공장의 휴머노이드가

무기로 돌변할 수 도 있고, 오작동으로 큰 피해를 줄 수 도 있겠지."


그는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처럼 계속 욕망만 채우려 하면 그 끝이 어디일까.
탐욕과 쾌락의 끝은 파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길을 달려온 거지
마치 알코올 중독자처럼 말이야 “


그러자 상범이 받아쳤다.


“야, 우리가 그렇게 살지는 않았지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나라를 위해 살아 온거야
자기를 희생하면서
솔직히 우리 자신을 생각한 적이 얼마나 되냐?”


그러자 기현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류의 이야기야.
우리는 하나의 세포처럼 그리 성실하게 살았지
그런데 인류는 자신들 만을 위해 살았다는 거야.”


살면서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터라 잘 몰랐지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기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자연과 공존하려는 의식 없이 가면,
멸종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어.


인간이란 종도… 성숙해져야 해.
마치 아이가 태어나 자기 욕심만 채우다
어른이 되어 타인을 배려하게 되듯,
이제 인류도 그런 단계에 온 거 아닐까?”


영호와 상범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껏 나 살기 바빴고, 가족을 챙기고, 회사를 돌보고,
나라 걱정을 했지만…
‘자연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자연을 ‘어떻게 이용할까’는 고민했지만,
‘어떻게 함께 살아갈까’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잠시, 묵직한 침묵이 흐른 뒤였다.
기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전환을,
과연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혹시… 농업화, 산업화, 디지털화를 통과해낸 우리가,
또 한 번 나서야 하는 건 아닐까?”


김태호가 진지한 눈빛으로 기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래서 난 가끔 생각해.
지금 청년들에게 단순히 일자리나 집을 주는 걸 넘어서,
상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지금까지 없었던 삶의 가능성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게 우리 베이비붐 세대의 마지막 사명일지 몰라.


우리가 만든 이 위기를,
우리가 만든 이 문명을,
우리가 함께 전환시켜야 해.
그냥 끝내는 게 아니라,
연결되도록.


기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런 생각은 가득하지만,
결국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으로 남았잖아.
어떨 땐 답답하고,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해.”


김태호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은, 단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속 깊은 곳에서 오래 묵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일까.
우리가, 아직도 시작할 수 있을까?


제4화 ; 설레는 만남 이어서 보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