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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방황하는 사람들

LeadXer, 리덱서 ; 대전환을 이끄는 자들

by 전하진

지윤은 정장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천천히 자신의 방에 들어섰다.

책상 위에 놓인 명함 한 장.

「ESG 전략기획팀 / Sustainability Planner / 이지윤」

예전엔 자랑스러웠던 그 직함이, 지금은 묘한 죄책감을 안겨줬다.


서울 강남에 본사를 둔 대기업의 ESG팀.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에게,

그곳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안정된 직장이었다.
연봉도 만족스러웠고, 카페 못지않은 구내식당, 명절마다 쌓이는 복지 포인트까지.


하지만 2년 동안 그녀가 매일 눈감고 외면해야 했던 것들은 점점 무거운 돌처럼 가슴에 쌓였다.

"ESG 보고서 디자인, 좀 더 컬러풀하게 바꿔봐요. 이왕이면 숲이 울창한 이미지로."
"탄소 배출 수치는 이 정도면 괜찮아. 어차피 벤치마크 대상 기업도 비슷하잖아?"
"지속가능성? 그건 이미지야, 이미지."


회의 시간마다 들려오던 말들.
진심 없이 포장된 ESG, 사회적 책임보다 브랜드 마케팅이 앞선 전략들.
지윤은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왜 이 분야를 전공했는지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이 좋은 조건을 왜 놔?”
“넌 참 바보처럼 진지하다.”
동기들의 반응도 예상대로였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정규직 놓는 게 말이 되냐?
너만 힘드냐, 다 그래도 참고 버티는 거야.”


아버지는 30년 가까이 은행에 다니다 희망퇴직으로 나왔다.
퇴직 후 다시 고용센터를 찾아 일을 해 보시려고 다니신다.

자신은 이 나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데,

딸은 고작 몇 년 차에 때려친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엄마는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거 찾아보는 건 좋은 일이지.

근데 생활은 어떻게 하려고?”


지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은 있지만,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며칠 후, 지윤은 동네 카페에서 나영을 만났다.
대학 동기이자, 지금은 기후 데이터 분석 스타트업에 다니는 친구.
나영은 늘 이성적이었다.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무너지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날 나영은 조용히 모니터 앞에 앉으며 스스로 중얼거렸다.
“기후도 중요하고 생태도 중요하지. 하지만… 밥벌이가 제일 중요해.”


그녀는 지윤의 순수함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그런 이상이 삶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요즘은 텀블러 하나 드는 것도 신념처럼 보여.
하지만 그게 진짜 탄소를 줄이는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난 집에 텀블러 여섯 개 있어. 다 행사 기념품.”


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영의 말은 뼈아팠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진수.
대학 시절 함께 프로젝트를 했던, 조용하지만 깊은 눈을 가진 친구.
그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탄소를 줄이는 ‘공회전 제한 장치’를 개발했다.
기술은 완성됐지만, 시장은 그들을 외면했다.
“수익은 어떻게 나죠?”
그 말 한마디가, 모든 가능성을 막았다.


진수는 결국 스타트업을 접고, 프리랜서 개발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지윤과 마주 앉은 카페에서, 그는 말했다.
“그거 다 쇼야. 진짜 기후 기술은 시장에 없고,
있는 건 ‘기후 마케팅’뿐이야.”


그러나 그 말의 끝엔 조용한 미련이 있었다.
진수는 아직도,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존경했다.
불편을 감수하며 신념을 지키는 사람들.
그들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카페를 나서며 진수가 물었다.
“너 아직 꿈 같은 거 있어?”
나영이 조용히 답했다.
“응. 근데 이제는 그걸 ‘꿈’이라 부르진 않아.
그냥… ‘남들한테 들키지 않고 오래 가는 마음’ 같은 거지.”


지윤은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의 현실은 다르고 감정도 달랐지만,
모두 무언가를 잃고, 동시에 무언가를 붙잡고 있었다.


그날 밤, 지윤은 오래된 노트북을 열고 대학 시절 제출했던 졸업논문을 꺼내보았다.
〈도시의 기후탄력성을 높이기 위한 에너지 순환 구조 설계〉


그때의 자신은 참 진심이었다.
도시를 바꾸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지윤은 천천히 그 논문을 넘기다 마지막 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거기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변화는 시스템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진심에서 시작된다.”


지윤은 조용히 노트북을 닫았다.
어쩌면, 지금은 그 진심이 다시 살아날 시간인지도 몰랐다.


제3화 ; 그들이 남긴 것은 이어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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