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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진 Mar 20. 2020

After Crisis #3  답답한 아이들

스케줄 텅 빈 학생과 엄마들의  미래는

  학교의 휴교가 전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엔의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104개 국가와 지역에서 약 8억 5천 만 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더 큰 문제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만에 하나 이 상황이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면 엄청난 충격과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우리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집에서 딩굴거리고 있다. 부모들은 이런 아이들을 지켜 보는 것 만으로도 천 불이 날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고 집에 있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그 중에는 부모를 도와주는 아이도 있을 테고, 게임만 하는 친구도 있을 테고, 또 어떤 아이는 답답함에 지쳐 동네 놀이터에서 혼자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도 많아질 것이다. 부모들도 아이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짜증이 많이 나겠지만 정말 이번 기회에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는 용기를 가져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미래의 진정한 성공 비결의 불씨를 찾아내는 귀중한 기회로 만들어 보자는 거다. 아마 아이들의 일생에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지 모른다. 


  미래 사회의 진정한 성공의 불씨는 다름 아닌 관심과 의지다. 무엇이든 간에 관심을 가지고 열정을 쏟는 다면 성공할 불씨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시키는 일만 하다가 매사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자아 실현을 위한 관심과 의지 이것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발현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찾을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못하는 게 지금의 교육 현실이다. 


  예를 들어 Youtube는 관심을 가진 주제에 대해 무한한 컨텐츠를 제공한다. 관심 있는 주제이기에 하나 둘 영상을 시청하다 보면 어느덧 그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갖게 된다. 이런 경험은 유투브를 보는 사람이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본인의 관심이다. 아무리 유투브에 무한한 컨텐츠가 있어도 관심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의지를 가져야 구해지고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이루어지며 그것으로 이 사회와 자연을 이롭게 했을 때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정말 경험할 수 없는 귀중한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3살 때부터 스스로의 불씨를 찾기 보다는 그저 시키는 대로 좋은 대학을 향해 기계처럼 성장한다며 미래 인재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취업을 해서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만족한다. 은퇴 후에는 공허하고 두렵고 아쉬워진다. 대체 뭘 하고 살았는지 후회를 하기도 한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자신의 관심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며 진정한 행복을 추구한다. 아마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자아 실현이라 하지 않던가. 그래서 인류 문명은 더 많은 이들에게 자아 실현의 기회를 주고자 인간을 대신하는 수많은 기계 노예들을 탄생 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제 머리를 대신할 노예까지 출현하여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수동적인 삶은 자신들에게 맡기고 능동적인 지성인의 삶을 살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 스스로 그들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텅 빈 이 귀중한 시간을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말고 가만히 지켜 만 보자. 자신에게 주어진 온전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지켜봐야 한다. 과연 우리 아이는 그리고 내 자신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지금까지는 학교 때문에 또는 시간이 없어 이것을 찾는 데 소홀했다. 그러니 내가 진정 무엇에 관심이 있는 지, 무엇을 좋아하는 지, 무엇이 되려 하는 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그저 기계처럼 살아온 것이다. 답답하더라도 무심하고 멍하게 시간을 쓰면서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지 관찰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자신의 의지만으로움직여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성공의 불씨를 찾는 길이다. 

   

  요즘은 그런 질문을 잘 하지도 않지만 ‘너의 꿈이 뭐냐?’라고 아이들한테 물어보면 대부분이 머뭇거린다. 좀 똑똑하다는 친구라면 공무원, 변호사, 의사, 사업가 등이 되겠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다. 자신의 행복을 찾는 도구에 불과하다. 도구가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의지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오직 자신만의 의지로 잉태한 불씨를 키우는 가운데 끊임없이 반문하며 추구하여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절정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자아의 실현이요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은 탄생 이래  산업화와 정보화를 거치면서 양적 성장을 이룬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의 양적 성장은 지구를 파괴하고 종말을 초래한다는 수많은 경고를 무시 한 채 여전히 양적 성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지만 이제는 질적 성장을 할 단계로 접어들었다. 인간에 비유하자면 인류 문명은 이제 성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더 이상의 양적 성장은 비만을 초래하고 그로 인한 수많은 병을 수반하게 된다. 한쪽에서는 쓰레기가 넘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기아가 넘치는 이 상황은 인류 문명의 질적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 한다. 인류의 지혜가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탓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만 보고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능, 지성, 인간관계, 인간성 등 수많은 것들을 감안하여 평가하듯이 인류 문명도 이제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을 통해 인류 문명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이른바 지성 사회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핵심은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을 위한 지성인을 육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성 사회에서는 지금의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결코 인공지능을 능가할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과거 로마 시대에도 노예들 중에는 주인을 대신하여 기억을 해주는 노예도 있었고 의사도 노예였다고 한다. 지식과 지성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지성은 나를 이 세상의 일원이자 주인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연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런 지성을 가진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노예와 주인의 구분은 내 시간을 내가 주도하는지 아니면 타인이 주도하는 지를 보면 쉽게 구분된다.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능동적이어야 한다. 수동적인 삶은 주인의 삶이 아니다. 


  자 이런 미래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우리 아이들을 배부른 노예로 키울 수는 없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어 하위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상위욕구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하였고 그 중 마지막 자아실현 욕구는 아래 4단계 욕구와는 달리 성장 욕구라고 정의하였는데 아래 4단계 욕구는 부족하면 채워야 하는 결핍 욕구이지만 자아 실현 욕구는 자신의 의지와 소망이 강렬할수록 그 욕구가 더 발휘되는 것이라 하여 성장욕구라고 정의한 것이다. 결핍욕구는 부족할수록 욕구가 강하게 발휘되지만 자아실현욕구는 의지와 소망이 없으면 시작조차 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자아실현 욕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하위욕구의 어느 정도의 충족이 필요하고 관심과 의지가 반드시 있어야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 사회적 자본이 어느 정도 하위욕구를 충족할 정도로 갖춰졌기에 이제는 많은 이들이 자아실현 욕구를 추구할 수 있는 지성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드키라는 밴드의 ‘행복하더라’라는 노래의 가사 중에 “하다 보니 되더라/ 꾸준하니 늘더라/ 미치도록 좋아하니 절정이더라”라는 구절이 있다. 내 의지로 하는 그 무언가를 꾸준히 하다 보면 결과를 얻게 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어 자신 만이 아는 어떤 절정을 경험했을 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공의 트로피를 갖게 된다는 의미다.  캔 로빈스 교수는 ‘타고난 재능이 열정을 만나는 지점을 ’엘리먼트‘라고 정의했는데 바로 이와 같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여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경험을 한 이후에는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항상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위해 기여한 자들에게 성공의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지성사회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진정한 성공을 누리게 해야 한다. 엘리먼트는 물질적 풍요나 지위에 관계없이 지식의 많고 적음에도 관계없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연과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지성적 가치를 추구할 때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지성적 가치로 인하여 쾌락과 엘리먼트는 구별된다. 우리가 온 정성을 다해 추구하는 명문대 졸업장이던, 경제적 풍요든, 아름다운 외모든 간에 지성적 가치를 추구하는 가운데 엘리먼트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다.      


  과연 우리 아이들 중에서 이러한 능동적인 삶을 가꾸어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면 우리 교육의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지금은 공무원이나 정규직을 선호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정규직은 기계 노예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업가나 프리랜서 등 자유직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니 정부가 추진하는 일자리 창출 정책이 미봉책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미봉책에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쯤 되면 ‘당장 먹고사는 게 힘든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본다. 맞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는 어쩌면 공염불처럼 들린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구조 및 주거환경 등을 모두 개혁해서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지성인들의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사회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개혁 프로젝트인지 상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노력이 신 산업을 일으키고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는 기폭제가 될 것이며 지성사회라는 새로운 인류 문명을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막 접어든 지성사회는 주인이 된 자들에게는 유토피아일 것이요 노예로 남은 자들에게는 기계노예들과의 치열한 생존 투쟁을 해야 하는 지옥이 될 것이다. 오히려 기계노예들의 파워에 의해 천덕꾸리기로 전락할 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저출산이 문제가 아니라 잉여 인구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나 학부모들이 영어 수학 공부가 부족해지는 걸 걱정한다면 그야말로 희망이 없다고 봐야 한다. 부모들도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지성사회를 대비한 주인의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늘 준 이 기회에 반드시 교육 개혁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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