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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진 Dec 01. 2022

ESG의 시작 ‘Who cares Wins’

'배려하는 하는 자가 이긴다' 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가 필요하다.

  2004년 UN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이 주도해서 작성한 ‘Who Cares Wins: Connecting Financial Markets to a Changing World’라는 보고서에 ESG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이듬해인 2005년에는 좀 더 진전된 ‘Who Cares Wins: Investing for Long-Term Value’가 발표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ESG경영의 공식 출발이다. ESG는 UN글로벌콤팩트에서 2005년부터 공식 용어로 사용되었고, 2006년 ESG 가치가 반영된 UN책임투자원칙(UN PRI)이 제정되어 기업 경영의 국제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세계적인 투자자인 블랙록 CEO 래리 핑크가 기업 대표들에게 보내는 연례 서한에서 투자자로서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에 너무 소홀했음을 스스로 반성하며, 기업들에게도 ESG 실천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그리고는 탄소배출이 많은 기업의 채권이나 주식은 매각할 것이며 또한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한 것이 ESG경영 확산에 기폭제가 되었다. 


  지금까지 ‘주주 이익의 극대화’는 기업의 유일한 경영목표였다. 아마도 많은 기업의 CEO들은 여전히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에 불과했다. 그런데 ESG는 그보다 훨씬 광범위한 대상을 향해 뭔가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서는 더 많은 비용지불을 요구받는 것과 같다. 가뜩이나 이익을 내기도 힘든 상황인데 여기에 ESG까지 하라고 하니 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ESG는 지금까지 소홀히 다루었던 환경(Environment)이나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는 이해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Society) 그리고 거버넌스(Governance) 측면에서 투명경영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달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환경이 파괴되는 이 상황을 내버려두었다간 우리 스스로 공멸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ESG를 제안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세계적인 투자자가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찌되었건 ESG는 이제 기업뿐만 아니라 지자체 그리고 국가 더 나아가 글로벌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코앞에 닥친 기후위기를 극복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일환이다. 


  그런데 ESG의 실천도 궁극적으로는 주주 이익의 극대화와 괘를 같이 한다. 다만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금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파괴가 결국 공멸을 초래할 것이란 소비자들의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에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의 상품을 거부할 것이라는 실리적 판단을 한 것이다. 개인들이 고도화되는 과정에서 이해당사자들의 권리 주장도 과거 같지 않기에 이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투명경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대두된 것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한 종합식품기업에서 경영진의 갑질, 노조 탄압 등을 이유로 불매운동이 지속되는 것이 그 한 예이다. ESG가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필요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 자국의 이익만을 최우선시 하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기후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문제 해결책으로서의 ESG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지난 수백 년 간의 인류 문명의 급격한 발전이 과연 선한 방향으로 진화된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제 기후위기가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는 드물다. 다만 그것을 피부로 느끼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이러한 변화를 예견하고 대비하자고 국제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벌써 수십 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소배출은 전혀 줄지 않고 계속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탄소배출이 지속되면 2040년쯤이면 임계치인 1.5도 이상의 기온상승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을 견뎌내던가 아니면 멸종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를 수없이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탄소배출은 늘고 있다. 산업화 이후 전 세계의 탄소배출 총량이 감소했던 시기가 딱 한번 있었는데 코로나19로 세계 경제가 거의 멈춰 섰던 2020년 전후다. 그리고 다시 경제가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탄소배출량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화는 결국 공멸의 길을 재촉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쿠테흐스 UN사무총장은 “인류는 기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고 경고한다. 



  누구도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지만 “과연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되물을 때가 온 것이다. “경제 활성화는 과연 우리에게 유익한 일인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돈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등등 지금의 ‘정상’을 ‘정상’이라고 여길 수 있는 지 되물어야 한다. 인류는 급격한 인구증가 그로인한 생태계 파괴, 급격한 산업화 그로인한 환경파괴를 불과 수백 년 남짓에 저지르고 말았다. 수 억 년간 조화를 유지해 온 지구생태계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변종을 만나 급격한 생태계 파괴를 당하고 만 것이다. 마치 우리 몸 안에 암세포가 갑자기 퍼져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구는 자신의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라는 암세포를 퇴치하려고 코로나19를 보내는 등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 폭주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거대한 움직임을 ESG가 멈춰 세울 수 있을 거 같지 않다. 보다 더 강력한 처방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경제 활성화를 멈추는 일이다. 생산을 멈추고, 건설을 멈추고, 이동을 멈추고, 소비를 멈추는 일이다. 그것만이 탄소배출을 줄이고, 지구생태계를 복원하고, 다른 생물종과 함께 생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멈춰야 한다. 암세포의 증식을 막아야 한다. 아니면 암세포를 제거하는 길 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만약 그것이 실패하면 자멸하는 길밖에 없다. 암세포처럼 증식을 멈추지 않고 결국 숙주와 함께 생을 마감하는 길밖에 없다. UN사무총장의 절규가 심각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멸종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경제를 멈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펜실베니아대학 사회학과 샘 리처드 교수는 “글로벌 위기의 해답이 한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기후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리더십을 우리 문화에서 찾은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은 아주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고, 엄청난 교육열이 있으며, 질서를 잘 지키고, 소프트파워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를 지목했다. 물론 전 세계 여러 석학들이 한국 문화에 주목하는 언급을 해 왔고 이미 한류는 K-Culture, K-Pop, K-Movie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일까. 필자는 우리 문화의 저변에 아니 우리 DNA에 수천 년 동안 자리 잡은 ‘홍익인간’이 한류의 근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 세계인이 이대로 살면 안 될 것 같은 이때에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우리의 마음이 한류를 통해 스멀스멀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탐욕에 찌든 세계인들이 금모우기를 하는 그 정신을 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을 하든 안하던 간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느낀다. 그것이 바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홍익인간’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것은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계도 이롭게 해야 함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평범한 홍익이 세계인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나라에서 나라가 어렵다고 없는 살림에 금모우기를 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하늘답게 살고자 노력하는 것 같다. 우리의 태극기는 우주의 섭리를 상징하며 삼라만상이 조화롭게 운용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종교도 잘 받아들였고 번성시켰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 유교, 원불교, 민족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지만 종교전쟁은 아직 없었다. 어쩌면 종교보다 더 근본적인 삶의 가르침을 DNA에 새긴 자들이어서 종교도 하나의 과목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홍익인간은 우리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아주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다. 우리 모두가 우리와 생태계를 이롭게 하는 홍익을 실천했다면 기후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탐욕으로 남의 것을 빼앗고, 자연을 파괴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위기에 직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홍익인간을 발현시켜 그 방향으로 자신의 일과 조직의 사명을 정하고 움직였다면 굳이 ESG를 논하지 않아도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자원을 파괴하고 그것으로 이익을 얻는 것은 홍익이 아니다. 억지로 가치를 만들어 돈을 버는 것도 홍익이 아니다. 모두를 이롭게 하는 그런 것을 찾아 하늘과 같은 삶을 살며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돈을 버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홍익을 실천하는 길이다. 지금부터라도 ESG에 앞서 홍익을 실천하는 사업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ESG에 앞서 ‘HongIk’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익’의 적절한 영어단어가 없음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독특한 고유명사임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HongIk’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 실천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샘 리처드 교수가 한국인에게 바라는 기후위기 대응의 리더십인지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이것은 ESG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우선적으로 기업인이나 정치인들이 이런 마음으로 가야할 길을 정하고 해야 할 일을 찾아 실천한다면 ESG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이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은 결과가 참혹하기에 이제는 드러내어 HongIk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 사업이 과연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사업인지 아닌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다. HongIk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감히 접어야 한다. 그것이 곧 HongIk을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마음을 정제하고 끊임없이 하늘에 물어 사욕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촌 생태계를 이롭게 하는 홍익을 실천하여 기후위기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발전과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기업의 사업모델을 폐기하거나 변경해야 할 것이고 또한 새롭게 사업이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평가는 홍익을 실천정도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며 ESG지표도 그렇게 구성되어야 한다. 온 세상이 반기는 기업과 조직 그리고 국가들이 풍성하게 나타날 때 인류는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기후위기도 해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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