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서동필 여행작가겸 에세이작가 Oct 21. 2020
이말산(莉茉山) 엘레지
며칠 전 아파트 주변 낮은 등산로를 산책하다 발견한 범상치 않던 석물과 무덤의 부속물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무게를 꽤나 견뎠을 오래된 돌들이 산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또한 상하고 훼손된 봉분들과 석축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는데 대체 누구의 조상 이길래 이토록 엉망으로 관리하고 있단 말인가? 그 수가 너무나 많고 장소 또한 광범위하여 집에 돌아온 후 즉각 인터넷을 뒤져 이곳의 실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말산’ 그러니까 북한산만 알았던 내가 은평 뉴타운 아파트들이 둘러싸고 있는 낮은 구릉의 뒷동산이 ‘이말산’이라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구파발 역 2번 출구에서 진관사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만날 수 있으며 높이는 약 133미터에 불과하다. 이말산을 지나 진관 근린공원, 하나고, 은평 한옥마을, 진관사까지 연결된 은평 둘레길 3코스에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 이말산 일대가 과거 조선시대 때 궁녀, 내시, 역관, 환관들의 집단 무덤 터였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무덤 수만 무려 1700 여기가 넘는다 한다. 게다가 비석, 석등,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등 무덤 석물도 13종 1488기가 발견되어 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설명하고 있다. 내가 오늘 밟았던 돌무더기 하나하나가 역사유물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저십리(城底十里), 도성 십리(都城十里)리라 하여 경복궁에서 십리 이내에는 묘를 쓸 수 없었다 한다. 그 십리 밖 지점이 이 곳 구파발 이말산 부근이다. 그러니 이곳에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영혼들이 잠들어 있을까? 그나마 내시의 최고 관직인 상선 노윤천과 현종의 보모였던 임상궁의 묘가 아직 관리 유지되고 있다 하니 다행이다. ‘이말(莉茉)’이라는 명칭은 산에 말리 또는 재스민 식물이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하지만 당시엔 흔하지 않은 왜래 꽃이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가 많다. 어쩌면 이씨 왕조가 묻힐 수 있는 끝 지점이라는 뜻에서 순수한 우리말인 이말(李末)이라는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건 아닐까?
사연을 알고 다시 이말산을 오른다. 잘 정돈된 나무 데크 계단과 산책로에 조팝나무, 산벚나무, 복사꽃 나무, 팥배나무, 밤나무 등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고 있다. 올라갈수록 등산로 주위로 흉물스러운 군사시설 잔재물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교통호(참호), 대전차 방호 진지, 기관총 유개호 진지, 콘크리트 벙커 등이 이말산을 찢어놓았다. 정상부에 오래된 녹슨 군사지역 경고 안내판이 과거 서울 북부 방어선을 구축한 요충지였음을 연상케 해주었다. 그마저도 지금은 이미 묘역만큼이나 시설물의 방치가 오래돼 수풀 속에 감춰져 섬뜩해 보였다. 이말산의 역사를 계속 지켜봐 왔을 저 멀리 보이는 삼각산과 북한산 능선은 오늘도 말이 없다.
궁녀, 내시, 역관, 환관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곧 지금의 관리 부실로 이어져왔다. 전문가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여기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지속해온 학자는 거의 없었다. 주변 아파트 주민들 또한 공동묘지에 대한 두려움과 미관상의 이유로 철거 항의를 줄곧 해왔다는 사실은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덤의 주인공과 그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고증하며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진다면 공포의 대상이 아닌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재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조선시대 궁중 문화 연구의 초석이 되어, 주민들의 자부심도 앙양할 수 있으리라! 조선시대 왕릉과 유적지처럼 당대를 이끈 분들을 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을 희생하며 궁중의 소금 역할을 했던 이런 분들을 당당히 발굴, 관리 유지해야 하는 것도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의무일 것이다.
다행히 구에서는 수년 전 ‘이말산 조선시대 분묘 종합정비 기본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몇 년째 공사는 요원한 상태다. 같은 둘레길 3코스에 있는 은평 역사 한옥박물관보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연 상태의 거대 박물관이 지금 모두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있다. 이말산 정상 표지석 뒤편에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이말산에 방치된 영혼들의 넋을 위로하며 도정을 바라보게 새우다.’ 이말산 일대가 유적 공원으로 재탄생하여 시민의 사랑을 받고 위로받을 수 있을 때가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려본다. 어디선가 ‘이말산 엘레지’ 노래가 계속 들리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