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된 식민지 남성성을 찾아서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여성의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을 읽고

by 김하종

국가보안법은 어디에나 있고 어느 때나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비상시기’라는 명분으로 형법보다도 5년 먼저 국회를 통과한 이 악법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생각이나 사상을 처벌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을 법률로써 처벌할 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검열하게 함으로써 사고의 확장을 애초부터 차단합니다.


특히 “국가보안법이 단순한 하나의 법률이 아니라 견고한 분단체제의 산물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체제이며,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을 순식간에 무력화하고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 이념 위에서 국가와 사회를 규율하는 헌법 위의 법이라는 점(9쪽)”은 우리가 일상에서 의식하지 못할 만큼 국가보안법이 만든 체제와 사고체계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은지를 스스로 되묻게 합니다.


더군다나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정권이 남북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김대중 정부였다는 사실도 아직 국가보안법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정권이 바뀌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간첩 조작’이 통용되는 공안당국의 관성과 이미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모순의 뿌리는 공고해 보입니다.


본인이 속해있는 대중단체는 대학생ㆍ청년으로 대표되는 미래를 빼앗긴 미래세대들이 기후 위기를 유발한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정의로운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기후 위기를 가속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탈 자본주의, 자본주의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도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 현재 대학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Z세대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법한 법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법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망가진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을 토의하는 테이블에만 앉고 나면 영락없이 국가보안법 체제를 살아가는 전형적인 ‘분단 청년’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사회주의ㆍ생태주의ㆍ여성주의를 말하는데 빨갱이가 대체 웬 말입니까? 그들에게는 탈 자본주의가 곧 사회주의고 공산주의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정말 어떤 개념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딱히 이유가 없는 거부감 말입니다. 이유 없는 배척이지요. 전쟁도 군사독재도 겪지 않았던 그들은 대체 어디서 ‘빨갱이’니 ‘종북’이니라는 말을 배워 서슴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걸까요?


이와 같이 자본주의 아니면 공산주의밖에 모르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국가보안법 체제가 만들어 낸 가장 대표적인 사고의 울타리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세상을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코로나 19 팬데믹과 기후 위기라는 인류에게 닥친 거대한 재앙 앞에 국가보안법은 말 그대로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걸림돌이지요.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명한 슬로건,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패러디한 독일 학생들의 구호, “자본주의냐 삶이냐”는 우리에게 놓인 현실을 직시하게 해 줍니다. 대안적 상상력을 구속하는 국가보안법이 계속 존재하는 한 더는 우리의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기존의 상식을 넘어설 수 없는 영원한 ‘문화 지체’에 묶여 있는(379쪽)” 우리 사고의 자물쇠를 여는 첫걸음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가지고 말의 세계에 입장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가지고 말의 세계에 입장하는 것, 말에 감금된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목소리를 전하고 남기는 일은 국가보안법의 질서와 권력을 흔들고 균열을 내는 일(11쪽)입니다.


최근 본인이 속해있는 대중단체에서 진행한 ‘랜선 신년회’가 끝나고 한 지부원으로부터 군사문화 등에 대한 언급이 공동체 내 평등 문화에 부정적이며 ‘군대 문화에 대한 언급이 잦고 모임 간 군 선ㆍ후배를 강조’하면서 ‘군대에 다녀오지 않는 사람들을 대화에서 배제한다’는 문제 제기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인권규약, 평등 약속 등을 서로 공유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고 신경을 쓴다고 한들 평소 꾸준히 ‘예민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언제든 기존 관성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던 경험이었습니다. 기존 진보 운동 진영에서조차 ‘식민지 남성성’으로 대표되어 ‘대의’에 여성을 동원하거나 남성 사회의 ‘자원’으로써 활용되는 문화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외세 혹은 국가 내부의 자신과 다른 진영에만 관심이 있고, ‘여성 문제’는 언제나 사소하게 생각하는(388쪽) 문화조차도 국가보안법과 함께 손잡고 박물관으로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자본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살림을 고민하고, 지금 당장의 이윤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국가보안법만큼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가지고 말의 세계에 입장해야 합니다. 최근의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은 “가부장제 사회의 근본 구조인 남성들 간의 투쟁에 동원되는 여성이, 스스로 그 위치성을 거부하고 시민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389쪽).”라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남성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말의 세계에 입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거대한 국가보안법 체제에 균열을 내고 분단사회를 살아가는 불운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각자의 삶터부터 변화시켜야 합니다. 본인이 속한 공동체를 더욱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야말로 개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고의 울타리를 걷어차고 대안적 상상력으로 국가보안법 체제를 박살 내는 일입니다.


또한 기후위기 비상사태라는 지금의 ‘비상시기’는 우리 스스로 생각을 검열하게 하고 사람의 행위가 아닌 생각이나 사상을 처벌하는 이 말도 안 되는 악법을 졸속으로 폐지시킬 명분입니다. 어떠한 사상과 이데올로기도 우리의 생존보다 우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어떤 잘난 대의명분보다도 마흔여덟에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집 밖을 나섰고 여든넷이 된 여태까지도 매주 목요일마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는 인권운동가 정순녀가 집회 대신 다른 엄마들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