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대신 손바닥을 제출함

빠른 시일 내 회신 요망.

by 김하종

오늘 논은 장례를 치른다

이삭마다 박힌 검은 점 ‘깨씨무늬’가

만장처럼 펄럭이고

바람은 향처럼 가늘게 탄다


늦게야 조문 대신 온 공문이

창고 같은 방으로 들어와

사진·영수증·피해내역·통장사본을

내놓으라 한다



노구를 이끌고 마을버스 첫차를 기다려

읍내로 나선다

돋보기 너머 글자는 모래처럼 흩어지고

휴대전화 인증 문자는 자꾸 늦는다

종이 한 장 내자고

허리는 창구 앞에서 한 번 더 굽어진다


서류 대신 손바닥을 제출하겠다

금빛으로 갈라진 지도 한 장

이랑과 고랑의 길이 겹쳐 앉은

살아 있는 증거를 내보인다


나는 호미다, 나는 탈곡기다

마디마다 새긴 굳은살로 날을 갈았고

이제 톱니 사이로

너희의 변명을 털고 싶다



비는 제때 오고

병은 제철에 번졌지만

늦는 것은 언제나 행정과 정치였다


판결은 논이 내린다

내년을 위해 오늘을 베어낸다.

종이는 반납하고

오로지 대지를 다시 받들겠다



이에,

서류 대신 손바닥을 제출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