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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과 사랑

빈칸도 괜찮아

이어질 문장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by 김하종

누군가 그려 준 직선이 있다.

입학–졸업–취업–결혼으로 이어지는

교과서 속 표준 시간표.


하지만 길은 지도 밖에도 나 있고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너의 시계는

너의 손목에서 비로소 맞춰진다.



수능이 며칠 남지 않은 날,

책상 위엔 지우개 가루가 얇은 눈처럼 쌓이고

초침 소리는 한 겹 더 크게 들린다.

시험지보다 더 두꺼운 건

네가 여기까지 건너온 날들의 무게다.


불안은 파도처럼 몰려오고

문제는 모래처럼 흩어진다.

파도는 금세 수평선을 다시 놓아 주고

모래는 발자국을 새로운 길로 만든다.



시험은 문 하나에 불과하지만

인생은 집 전체를 짓는 일이다.

정답 칸이 전부는 아니다.

빈칸 뒤엔

앞으로의 문장이 기다린다.


혹시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몸을 약간 기울여 걸어도 괜찮다.

흔들렸다고 해서

덜 단단한 것은 아니다.


결과가 오는 속도보다

사람이 자라는 속도는 느리다.

느리다고 틀린 건 아니다.

길이 멈춘 게 아니라

잠시 방향을 고르고 있는 시간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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