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7. 미술관의 흰 벽과 프레임

여백이 먼저 읽는다

by 김하종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가방을 가볍게 한다. 얇은 책 한 권과 얇은 재킷, 작은 연필 한 자루. 미술관 로비의 공기는 서늘하고 균일하다. 금속 난간, 매끈한 타일, 유리 박스. 매끈함을 담은 공간. 이 공간에서는 온갖 여백이 제일 먼저 말을 건네온다.


전시실로 들어서면 흰 벽이 먼저 보이고, 그다음에 프레임이 보인다. 작품들은 하나씩 자신만의 경계를 달고 있다. 나무, 알루미늄, 때로는 유리의 얇은 테두리. 나는 작품보다 먼저 그 테두리를 본다. 프레임과 여백을 보고 한 줄 읽는다. 이 순서가 오늘의 독서 순서가 된다. 전시장 벤치 한쪽에 앉아 책을 펼친다. 페이지의 여백과 벽의 여백이 같은 흰색으로 겹친다. 겹치면 안쪽의 글들이 정돈된다.



첫 문장을 소리 없이 읽는다. 프레임의 두께만큼만 눈을 전진시키고, 프레임 모서리에서 한 번 쉬어 간다. 오래 보려는 욕심을 줄일수록 단락의 골격이 보인다. 나는 표지판을 읽지 않는다. 제목도, 연도도, 기법도 오늘은 미뤄둔다. 세세한 설명들을 덜 읽으면, 전체 모양이 더 읽힌다.


유리 표면에 천장 라이트가 길게 비친다. 긴 막대 빛이 프레임을 따라가다 코너에서 부드럽게 꺾인다. 그 꺾임이 마음의 각도까지 살짝 바꾼다. 프레임의 90도를 87도로, 다시 92도로. 눈에는 거의 티가 나지 않지만, 생각에는 확실히 티가 난다. 나는 책의 모서리를 엄지로 누르며 같은 각도를 흉내 낸다. 각도를 조금씩 바꾸면 속도가 조금씩 바뀐다. 속도가 바뀌면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달라진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김하종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기후정의 활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 아프고 힘들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들려줄 사랑 이야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8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4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