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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포공항 게이트 앞 좌석에서

출발 직전 한 문장

by 김하종

보안 검색대를 지나 오픈 스페이스로 나오면 공기가 달라진다. 바닥의 광택, 높은 천장의 유리 격자, 멀리 활주로를 가르는 얇은 빛. 전광판의 노란 숫자 옆에 ‘JEJU / CJU’가 번쩍인다. 나는 롤러백을 발끝에 세워 두고, 창가 쪽 게이트 앞 저등 좌석 한 칸을 고른다. 한 손에는 얇은 책, 다른 손에는 탑승권. 오늘의 읽기는 이 두 장의 종이 사이에서 시작된다.



먼저 자리를 정리한다. 물병을 좌측, 탑승권을 책 뒤에 슬쩍 끼우고, 휴대폰은 화면이 아래로 가도록 뒤집어 둔다. 유리 너머 활주로의 흰 선들이 격자로 얽혀 있다. 선은 방향을 만들고, 방향은 마음의 속도를 조정한다. 나는 여백 위에 점 하나를 찍는다. 오늘의 단어를 고르기 전, 늘 먼저 찍는 작은 점. 이 한 점은 읽기를 서두르지 않게 하는 장치다.


표지—차례—첫 문장. 출장길에 굳어진 내 루틴을 그대로 밟는다.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 종이의 결을 확인하고, 차례에서 현재 위치를 가볍게 짚는다. 그리고 첫 문장. 오늘도 길게 읽지는 않는다. 대신 시작을 정확히 한다. 시작이 정확하면 주변의 낯선 환경이 점점 익숙해진다.


첫 문장을 소리 없이 따라 읽는다. 유리의 냉기가 어깨로 천천히 번지고, 의자 등받이의 낮은 탄성이 허리를 바로 세운다. 시선이 글자 위를 지나가다가, 문득 게이트 로프의 붉은 띠에 멈춘다. 경계가 분명한 곳에서는 문장도 분명해진다. 오늘의 단어를 정한다. ‘경계’. 떠남과 머무름의 경계, 바깥과 안의 경계, 읽기와 보기의 경계.


“게이트의 붉은 로프를 지나며, 나는 문장과 여행의 경계를 동시에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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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기후정의 활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 아프고 힘들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들려줄 사랑 이야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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