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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과 사랑

제주 바다 위에 남은 좌표

같은 섬, 너를 지나야만 겨우 닿는 곳

by 김하종

도망치듯

제주로 내려왔다.


공항 유리문이 열리자

짠내가 먼저 나를 알아본다.


낯선 섬일 거라 믿었던 이곳에

우리가 먼저 와 서 있었다.



시장을 지나가면

비닐봉지에 귤이 차는 속도로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손바닥 위에서 굴려 보던 귤 크기,

그 장난스럽던 손짓과 해맑은 웃음

유독 귤을 닮았던 너의 얼굴.


같은 골목을 걷다가

일부러 모르는 가게에 들어갔다.

오늘 처음 보는 빵집 이름,

사장님의 사투리 한 구절.


우리의 시장이 아니라

조금씩 나의 시장이 되라고

조용히 포인트를 적립한다.



귤밭에 들어서면

한겨울에도 손끝이 따뜻하던

그 해의 햇빛이 따라온다.


장갑을 나눠 끼고

누가 더 많이 땄는지

서로 자랑하던 그날의 웃음이

나무 사이로 스며 있다.


오늘은

조금 덜 익은 청귤을 고른다.


지난번과는 다른 설탕 비율,

다른 불 세기,

레시피 맨 끝 줄엔

다른 이름을 적는다.


뚜껑을 닫고 나니

이 병은

둘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을 견디기 위한

나만의 처방전 되어 줄 것만 같다.



바닷가를 걸으면

파도 소리보다 먼저

네 웃음이 밀려온다.


예전에 나란히 남겼던 발자국보다

조금 옆으로 비켜 서서

혼자만의 길을 그려 본다.


이어폰을 끼고

말 대신 기록을 남긴다.


오늘 바다는

어제보다 진하다.


지도를 바꿨는데도

마음의 좌표는

여전히 같은 곳을 가리킨다.


네가 서 있던 횡단보도,

같이 앉았던 카페 창가,

귤 껍질을 쌓아 두던 탁자 앞에서

심장은 습관처럼

예전 시간을 불러들인다.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

그 위에 얇게

다른 하루를 포개어 보는 중이다.


언젠가 다시

제주 바다를 떠올렸을 때


네 이름보다 먼저

오늘의 좌표들이 떠오를까.



그때쯤이면

이 섬은

아마 지금처럼

너를 먼저 불러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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