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자아성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준 Apr 10. 2022

길은 몰라도 된다.

이 길의 끝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래도 괜찮다.


뭐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던 시기였다. 나를 응원해 주지 않을 거라면 가만히라도 놔뒀으면 좋겠는데,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너 좋으라고 하는 말이지.'


아니, 나 좋으라고 하는 말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왜 귀는 입처럼 닫을 수 없게 설계된 건지 진심으로 조물주가 원망스럽던 날들이었다. 귀에 피가 나지 않으려면 일단 피해야 했다.


혼자 산책을 자주 했다. 산책로가 있지만 그곳은 늘 사람으로 붐비니 그냥 정처 없이 사람을 피해 걸었다.


다른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가 거슬렸던 , 나조차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였다. 호기롭게 선택한  길이 내가 잘할  있는 길은 맞는지,  길의 끝에는 내가 원하는  모습이 있는 건지, 애초에 내가 원하는 모습이라는  어떤 것인지,  어떤 것도  수가 없었다.


확신 없는 미래는 내가 그 어떤 길 위에 서있어도 길을 잃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 어디도 갈 곳이 없어서 영영 길을 잃은 것만 같이 막막하고 두려웠다.


닿을 곳이 없어서 그냥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길을 잃으면 그곳에 꼼짝 않고 서 있으라 하던데, 그건 어린이만 해당되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그 누구도 찾으러 오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 대신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가만히 서 있다가는 해가 져 버리고, 땅이 꺼져버릴 것 같은 어둠만 찾아올 뿐이었다. 해가 떠있을 땐 부지런히 어딘가를 찾아 걸었고, 해가 지려고 할 땐 빛이 보이는 곳을 찾아 걸었다. 그게 목적지를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걷다 보니 여전히 길은 몰라도, 걷는 것만큼은 자신이 생겼다. 두 다리에 힘이 생기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니 길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길을 만났을 때는 골목골목을 찬찬히 거닐어보는 여유도 생겼다. 나와 맞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면 큰 길로 나가 새로운 길을 찾아 또 걸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가고 있는 길의 풍경이 싫지는 않다. 좋아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길의 끝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래도 괜찮다.


또 다른 길로 걸어가면 되니까.


내게 필요한 건 수만 갈래의 길이 그려진 지도가 아니었다. 길은 몰라도 된다. 길을 잃었다는 패닉에 발걸음이 얼어붙지만 않으면 된다.


기꺼이 길을 잃을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언젠가 내 마음에 드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god, 길 가사 中


매거진의 이전글 눈을 세 번 깜빡이면 햇빛의 계절은 시작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