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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준 Apr 22. 2021

재인쇄

 이번에도 인쇄가게에 들러 스무 권을 더 찍었다. “찍었다”하는 표현이 맞는 게 책의 접는 부분, 다시 말해 책등 위치엔 스테이플러가 박혀 있고, 서른 페이지밖에 안 됐다. 가로, 세로 사이즈는 딱 전단지 책만 했다. 표지임을 나타내려고 누런색을 고른 종이 위엔 세로로,


 ‘괜찮타, 그쟈 이학준’


 이라고 쓰여 있다.


 스무 권이 구겨지랴 조심스럽게 가방에다 집어넣고 한성대입구역으로 향했다. 거기가 무슨 구 무슨 동에 속하는지 모르고 한성대를 다닌다 하는 녀석은 만나본 적도 없지만, 오늘 스무 권을 찍고 나서는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이다.


 전철역을 빠져나오자 그칠 것 같던 눈이 그쳤고, 역 주변 포장마차에 손님들이 제법이다. 사람들 발자국을 다 기억해내고 싶은지 눈은 쌓여서도 자신을 하얗게 비워 놨다. 걸어가는 나는 가슴이 콩닥거린다. 처음 스무 권을 찍었을 땐 단순히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내가 글을 쓰는 중이란 걸 알리기 위해서였는데, 이것도 책으로 봐주고 기꺼이 판매를 해도 괜찮다니. 그날 스무 권을 받아준 독립책방이 가까워온다. ‘오디너리북샵’ 유리문 바로 너머로 보이는 진열장에 내 책 샘플 한 권이 놓여져 있다. 얇은 두께가 부끄럽고, 그림이 아닌 글씨로만 된 표지가 쑥스럽지만, 그 내용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자신 있는 책. 


 스무 권을 전달해 드리면서 이번에도 감사한 나머지 인사를 푹 드렸다. 곧바로 책방을 나왔지만 나는 또 유리문 너머의 내 책을 빤히 들여다본다. 무슨 볼일이 남으셨나 하면서 사장님이 내 쪽을 살피셨을 때, 그제야 제대로 발을 돌린다. 눈이 그친 눈길은 밟는 자리마다 발자국이 구정물로 바뀌면서 녹고 있다. 나는 책방으로 이어지는 이 길에 구정물이 하나라도 더 생길까봐 이미 밟아 놓은 자리들만 밟으면서 조심조심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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