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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준 May 19. 2021

계약 파기

첫 번째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두 번째 출판 계약을 했다. 작지만 내 글을 좋아해주는 출판사였고, 내가 써오던 대로만 쓰면 책을 출간하기까지 어렵지 않을 거라고 내다봐줬다. 그런 호의가 포근했던 걸까, 나는 글 쓰다가 잘 안 되면 놀러가듯 출판사를 찾아가곤 했다. 멋모르는 내 고민거리들을 편집장님께서 다 들어주셨고, 그런 식으로 자주 만나다보니까 편집장님과 나는 자연스레 술친구가 돼 있었다. 


술김에 잘못 나온 말이겠지. 그런데 간밤에 편집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도무지 안 잊힌다.


“출판사하고 계약했음 더 이상 학준씨 글이 아니지.”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나온 말이라 당시에는 그냥 듣고 흘렸다. 술김에 나온 속마음까지 일일이 걸고넘어지는 건 술친구다운 면모라고도 볼 수 없다. 하지만 뒤늦게, ‘편집장’이라는 위치를 떠올려 보았다. 책을 내기 전 내 글을 솎아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편집장님이란 걸 알게 되자, 나는 어저께의 편집장님이 겁이 나기 시작했다. 원고 마감 날짜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혼자 책상에 앉아서 편집장님은 좋은 분이셔, 좋은 분이셔,…… 언제까지 속마음을 다져야만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최종 원고를 보낼 무렵 나와 편집장님은 더 이상 술친구가 아니었다. 계약서를 쓸 당시 편집장님으로부터 듣기 좋았던 말이, ‘학준씨 평소 쓰던 대로만 써’였는데, 알고 보니 그 말은 편집장님께서 내게 내준 숙제였다. 원고 메일에 대한 답장이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떨릴 새도 없이 열어보니까, 글의 목차 가운데 절반가량이 빨간 색깔로 표시가 돼 있었고, 그 빨간색이란 절대 책에는 실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계약금 돌려드릴 테니까 계약 취소해주세요.”


스스로가 우려했지만 내가 선택한 행동은 계약 파기였다. 문자로 내용을 쓰고 떨리는 손이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글의 절반이나 빼거나 고치라니. 나는 그 무엇보다 내 원고를 그렇게나 빨리 채점해버린 편집장님의 행동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핸드폰엔 한동안 답장이 안 온다. 나는 내가 쓴 문자 바로 밑에 지금 편집장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겠다는 내용을 더 보냈고, 결국엔 계약금을 돌려드릴 계좌번호가 적힌 답장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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