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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준 Jul 16. 2021

복수전공

아침마다 디자인과 건물로 들어서면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복도 곳곳에 난파된 것 같은 조형물들이 서 있고, 간밤에 저런 걸 만드느라 다퉜을 졸음들이 입을 벌릴까 말까 하는 조개의 함성처럼 들렸다. 인문대 건물로만 드나들었던 내가 여기에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했는데, 얕은 물에서 나는 제법 헤엄도 칠 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물속 깊은 곳에도 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한 학기 동안 들었던 디자인과 전공 다섯 과목에서 전부 A를 받아낸 것이다. 사학과로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학점인데 말이다. 나는 복수전공까지 해서, 지금의 도강생 이미지가 아닌 제대로 된 디자인과 학생이 돼보기로 결심했다. 서둘러 미술학원부터 등록해야 된다. 수업만 듣는 것과는 달리 복수전공까지 하기 위해선 ‘발상과 표현’이란 미술 실기 시험을 반드시 치러야 됐기 때문이다.


여느 미술학원이나 입구엔 자신들이 길러냈다는 학생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물감들이 너무나 입체 같아서  앞을 지나칠  발걸음조차도 느려지는. 공공연한 빛까지 쪼개어가며 그렸을 저들의 실력은 아마도 역시 노력이었을 테다. 나도 저런  그려내야 된다는데 시험까지는 고작 방학 3개월 동안만이 남아 있다. 디자인과 친구의 손을 붙잡고  애가 일한다는 미술학원을 찾아가보았다. 학원 원장님께서  상황을 잠잠히 들어보시고는,  이제서야 찾아왔냐는 물음을 삼키시는 , 그럼 하루도 빼먹지 말고 학원에 나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고등학생들 틈바구니인 이곳이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려해주신 대로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 과연 합격이  만한 그림인지 점을 치듯 그려보고 그려보다 보면, 다들 어디로 사라졌지, 오늘도 제일 마지막이구나 그제야 알아차리고 붓을 씻으러 나서는 것이었다.


시험 결과가 발표된 날이었다. 입시만큼 까다롭게 심사하지는 않는다 들었는데 ‘불합격’이란 소식이었다. 함께 수영하고 놀았던 디자인과 친구들을 물속에 남겨두고 혼자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한 학기 동안에 흠뻑 젖어버린 상태였다. 어디론가 들어가서 젖은 몸을 좀 말려야 되겠는데, 나를 받아주는 곳이라고는 벽돌 색깔마저 건조한 인문대 건물밖에 없었다. 한 사학과 친구가 다가와서 말 건넨다.


“학준아. 니도 그냥 공무원 준비해라. 우리 과 나와서는 답 없는 거 알잖아.”


사학과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 멘트일 것이다. 그러는 친구의 팔엔 토익 책만큼이나 두꺼운 경영 혹은 경제학과 전공서적이 들렸다. 나에게 춤을 가르쳐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나보고 공무원을 준비해라니. 그러면서 저만은 경영, 경제 쪽으로 복수전공을 하고 있다는 김은지한테 배신감마저 밀려왔다.


담배를 안 피우는 나와 김은지는 인문대 건물 앞 흡연구역 의자에 앉아서 나란히 수업에 들어가기를 싫어하곤 했다. 사학과 전공수업들은 도무지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절반 이상이 한문으로 된 수업을 견딜 바엔 지난번처럼 남포동 구제시장에 옷 구경이나 하러 가자고. 그러던 김은지였는데, 마치 사학과들처럼 나에게 위로 멘트를 치고는 저 멀리 인문대 복도를 사라지고 있다. 예전 새내기 때 가끔 학교에 나타나서 제 옷맵시만 자랑하고 사라지던 그 뒷모습이 아니다.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마르지 않는 나는 가만히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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