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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준 Aug 02. 2021

부산

스스로 사학과라서 싫다더니 아르바이트로는 보습학원에서 한국사 강사 일을 한다. 좀 이따 칠판 앞에 섰을 때 조마조마해하지 않기 위해 대학생 신분인 강의실에서조차 몰래 한국사 문제집을 펼쳐본다. 학원의 수업은 중학생 몇 명 앉혀 놓고 하는 아주 소규모이다. 들어주는 사람은 그 중에도 몇 명뿐이지만 목청껏, 기왕이면 원장실에까지 티가 나라고 목청껏 가르친다. 시간표를 마치고 학원을 빠져나오면 그제야 목 안이 칼칼해온다. 바로 앞이 2호선 문현역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지나치고 세 정거장 거리쯤 되는 집까지 걸어갈 참이다.


부산 사람이 아니라면 한 번씩은 다 헤맬 수 있게 문현로터리의 길도 복잡하다. 더 짧은 길은 고민하지 않고 올 때 버스를 타고 왔던 길로만 되돌아간다. 활처럼 휜 도롯가에 차선이 더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은, 거기 파라솔을 펼치고 채소를 팔던 상인들이 밤이 되자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에 백만 원이 넘는 월급이 들어온다. 그런데 모아야 될 필요란 여전히 안 생겨서, 학생 식당보다 더 비싼 곳만 찾아다니고 어설프게 번지르르한 대학가 술집을 드나든다. 예전의 그 패기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라도 자켓에 가방, 넥타이까지 사서 제법 고상한 일을 하는 척도 낸다. 본인의 파라솔을 펼치고 싶어 자리다툼을 벌였을지도 모를 이 도롯가를 어리바리하게 백만 원을 다 쓴 내가 밟고 지나간다. 조금만 더 걸으면 그 다음 지게골역이다.


나는 아마도 이 오르막을 걸으려 전철을 안 탔지 싶다. 지게골역을 지나자 대연고개로 불리는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차들만 오르내리는 도로 한 귀퉁이를 오늘 할 일을 다 한 내가 뭉그적뭉그적 걷는다. 도로를 뺀 고개의 나머지에는 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곳의 골목 하나가 보이면, 가파른 경사를 오래된 집들이 지키고 있다. 그러나 수명이 다 되어가는 듯 활력이 없는 가로등이 조만간 여기에도 재개발이 시작될 거라 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내리막길이다. 오르막길, 내리막길. 부산에는 평지처럼이나 고갯길이 많다는 걸 요즘 부쩍 실감한다. 이곳의 대학생으로서 그동안 나는 얼마나 고개를 잘 지나왔을까.


곧 내리막길이 끝나면 못골역, 그리고 다음이 내가 사는 대연역이다. 그 주위의 대학가는 자정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초저녁과 마찬가지일 테다. 대학교 4학년이지만 회사원, 공무원 되는 게 싫은 우리들끼리 만약에 오늘도 한 잔 한다면 내일 오전 수업쯤은 제끼면 그만이다. 이토록 정해진 것 없이 자유로운 삶인데, 나는 오르막을 걸으나 내리막을 걸으나 왜 밤하늘이 두 뺨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을까. 오늘도 별이 안 뜨니까 밤하늘은 위치를 잃고 차가운 두 뺨은 애꿎은 밤하늘만 계속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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