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외박
기숙사를 나와 경주에서 딱 하룻밤을 잔 뒤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간다. 달리는 창밖으로 기와지붕의 개수가 점차 줄어드는 게 경주를 벗어나기 시작했음이다. 내가 앉은 버스 맨 뒷자리엔 열일곱 살이 슬픔을 삭이는 냄새가 난다. 단단한 채비 마냥 커다란 가방 속엔 다음 외박 때까지 입을 옷가지와, 사감의 눈치를 보더라도 숨겨놓고 먹을 과자 부스러기들. 그러나 내 귀에 꽂힌 mp3 이어폰에선 나를 좀 살려달라는 차원의, 신께 기도하는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문 밖에 기와지붕 대신 세련된 건물들이 보이면 아마도 거기부터가 포항이다. 경북에서 제일 큰 도시답게 건물들끼리 또 간판들끼리 경쟁을 벌이고, 공업도시란 제 이미지를 따돌리려고 아름드리나무들도 곳곳에 심어 놨다. 하지만 내겐 소용없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내겐 회색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도착한 포항시외버스터미널은 맞닿은 경주의 서너 배 넓이나 된다. 맨 뒷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내리는데, 내려오는 일이 이리도 쉬운 걸로 보아, 나란 아이도 회색을 띄고 있나 보다.
경주에서 시외버스를 타기 전 엄마는 나에 대한 안타까움을 삼키면서 내려서는 꼭 택시를 타라며 차비를 챙겨줬다. 줄 선 택시들 가운데 아무거나에 올라타서
“아저씨, 영신고등학교로 가주세요.”
그러는 나는 아저씨한테라도 따져보고 싶다. 저 역시 딴 녀석들처럼 중학교 졸업식 이후에 경주에 있는 고등학교를, 그것도 제일 공부를 잘해야만 간다는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저는 왜 포항으로 온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