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쯤 머물기로 작정하고 고향인 경주에 내려왔다. 서울에서는 밤낮이 뒤바뀐 삶을 살다 보니 이곳에서 나는 시차를 겪는 외국인 같았다. 모두 잠든 새벽에 혼자 깨어 있고, 해가 뜨고 나면 잠이 드는데 나를 세끼 다 챙겨 먹이려는 엄마 덕분에 그나마 식사 시간은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면서도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바로 가까이의 아빠 눈치가 보여서다. 잠에 취한 상태로 밥상머리에 왔다가 또 슬그머니 자러 들어가는 내 모습이 도저히 예뻐 보일 리는 없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믿는 사람이 우리 아빠다. 내가 대학생 때 아빠가 기숙사로 들어온 적이 있는데, 방바닥에 널브러진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네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알겠다며 내 대학 생활 전반을 나무랐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렇게 말이 없어도 속으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지 나는 아빠가 조마조마한 것이다.
누웠지만 잠들지 않은 상태인데, 바깥 거실에서 TV가 켜진다. 낮에도 뉴스를 챙겨보는 아빠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들을수록 방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TV가 아닌 방문 바로 옆의 소파에서 들리는 것 같다.
“…상대방에게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방법은…”
말투나 내용이 강연이었다. 엄마는 미용실에 커피 마시러 갔는데, 최근에 스마트폰을 배운 아빠가 소파에서 유튜브라도 보는 걸까. 그런데 들을수록 그 내용이 의아했다. 평생 우리 아빠가 모르쇠로 살아온 것들에 대해 동영상이 계속 가르치고 있었다.
닷샛날, 저녁밥을 다 먹고 부모님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 이제야 시차를 극복하고 낮 시간에도 쌩쌩할 것 같은데, 곧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밤공기라도 실컷 마셔야지.
“여기 카페 새로 생겼네. 커피 한 잔씩하고 가자!”
떠나기 전에 한 가지라도 더 하고 싶었다. 다행히 부모님도 내 뜻에 따라준다. 예전 같으면 아빠는, 너희들끼리 마시고 오라 하고 혼자서 휙 가버렸을 텐데, 확실히 부들부들해졌다. 커피숍 안에서 또 한 번 증명이 됐다.
“야야, 들어봐라. 니 이제 나이를 한두 살 먹은 것도 아니고 뭔가 자리를 잡던지 해야 안 되겄나? 우리가 많이 보태주진 못해도 니 결혼할 자금은 따로 빼놨거든. 글 쓰는 걸로 못 먹고 살 거 같으면 함부레* 일찍 접고, 다른 걸 준비를 해봐라.”
아빠의 말투는 정말이지 부드러웠다. 앉혀놓고 대화하는 법을 몰라 하나로 열을 판단해 버리던, 과연 우리 아빠가 맞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달달한 라떼를 시켜놓고 쓴맛만 느끼고 있다. 날 위한 결혼식 비용을 마련해 뒀다니. 내일 서울로 돌아가면 나는 또다시 풋내가 나는 작가이고 따라서 글쓰기에 더욱 매진해야겠는데, 이런 내 포부를 이 타이밍에 밝히자니 유튜브로 공부한 아빠의 말투가 너무도 부드러웠다.
*미리, 미리 생각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