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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제자

by 이학준

늘 그랬듯 이번에도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학생들을 통솔하는 교장의 역할로 서울에 와 있는데 너만 괜찮다면 만나서 커피 한 잔 하고 싶다고 말이다. 카톡을 보내는 그의 말투는 몹시 조심스러웠다. 몇 번이나 그의 연락을 거절해온 나의 잘못일 것이다. 이번마저 거절하는 건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내일 저녁에 그가 머물고 있는 강남의 숙소 근처로 찾아가겠노라 답했다.


중학교 3년 내내 나를 따라다닌 별명이 있다. 바로 “문예부 애제자.” 경주에는 경주 출생의 작가 이름을 딴 글짓기 대회가 많다. 중1이 되자마자 시내 백일장에 나가 상을 타오는 바람에 나는 클럽 활동이 자동으로 문예부가 됐다. 문예부 선생님은 수업을 빼주면서까지 나를 온갖 글짓기 대회에 데리고 다녔다. 학교 내에서 언젠가부터 나를 두고 “문예부 애제자” 혹은 “문예부 선생님 애제자”라며 놀리듯 부르기 시작했다. 대회마다 상을 타오는 내 잘못도 있지만, 교실에서 심지어 교무실에서까지 나를 자랑하고 다닌 문예부 선생님의 잘못이 더 크다.


이십 대가 되어서 중학교에 한 번 찾아가 봤다. 고향 집과 가까운 거리이기도 했고, 과거 3년 동안의 내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교무실에서도 괜찮게 나를 반겨줄 것 같았다. 역시나 가장 좋아해 주는 이는, 단 한 번도 내 담임을 맡은 적 없는 문예부 선생님이었다. 점심을 사주겠다는 그를 따라 학교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시외의 글짓기 대회까지 다니면서 그와 밥을 먹던 추억이 떠올랐다. 서로의 근황에 관해 나누다가, 최근부터 제대로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는 나의 말에 그는 취미로만 쓰는 건 문제가 없으나 직업으로 삼게 되면 무조건 힘들어질 거라는 현실적인 조언만 늘어놓았다. 이십 대의 패기로 가득 차 있던 나는 울컥 반항심이 올라왔지만, 참고 밥을 먹었다. 서로의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며 두 번 다시는 그에게 내 근황을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서울에서 내가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나의 중학교 동창으로부터 뒤늦게 전해 들은 그가 서운하다는 말투의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 뒤로 달력에 명절 연휴가 조금이라도 길어질 때면 어김없이 경주에 내려와 있냐는, 밥이나 술을 같이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때마다 어영부영 그와의 만남을 미뤄 왔던 내가, 이십 대 때 중학교를 찾아간 후로 십여 년 만에 그를 만나러 와 있다. 호텔 로비에서 마주한 그는 지금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지만 예전 패기 넘치던 문예부 선생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잘은 모르겠으나 죄송스러웠다. 나를 몸보신시켜 줄 거라면서 근처의 고깃집들을 봐놨다는 그한테 몹쓸 짓이라도 저지르며 살아온 것처럼 죄송한 감정이 들었다. 해맑게 웃고는 있어도 그 역시도 알 것이다. 내가 당신과의 만남을 계속 미뤄 왔다는 것을. 한 소고깃집으로 들어가 소맥 한 잔씩을 빠르게 마셨다. 일말의 어색함부터 없애고 봐야 했다. 다행인 것은, 환갑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그는 세월을 비껴간 것처럼 아주 기운차 보였다. 몇 년 전 아내와의 사별을 겪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전해 들었지만 말이다.


동료 작가하고 술을 마시는 것 마냥 즐거웠다. 예전 추억도 추억이지만 서울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해야 살아갈 수 있는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고단한 작가 생활을 내 입으로 풀어놓다 보니, 직업으로 글을 쓰겠다는 제자에게 현실적인 조언들만 들려줘야 했던 내 이십 대 때의 그가 자연스레 용서가 됐다. 그는 요즘도 글을 쓴다고 그랬다. 핸드폰을 꺼내 본인이 쓴 시를 자랑하듯 보여주는 모습에서 그가 여전히 패기 넘치는 이유를, 눈망울이 맑은 이유를 알아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제자가 은사(恩師)에게 소고깃값을 계산하게 한 뒤, 둘이서 강남의 골목을 걸어갔다. 네가 이 길, 그러니까 글 쓰는 일에 몸을 담은 이상 선생님은 너의 팬일 거라고 말하신다. 그러고 호텔 앞에서 헤어지는 게 아쉽다 하며 전철역까지 나를 따라왔다. 인사를 하려는데, 별안간 그의 표정이 엄해지더니 주머니에서 꺼낸 흰 봉투 하나를 내 손에 덥석 쥐어준다. 차비 하란다. 나는 술이 확 깨 그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결국엔 받아 들고야 말았다. 멍하니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눈에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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