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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준 Sep 08. 2015

젖은 낙엽

 




 문득 나그네가 밟고 지나가도 바스락 웃으며 부서지겠다 하는 각오로, 낙엽들은 아스팔트 위를 그렇게 누워 있다. 수업 종이 울리자마자 급식소로 몰려가는 허기진 배들이 그 수줍은 각오를 알아차렸을 리 없다. 그나마 가을을 겸연쩍어하며 교복 깃을 한번 세워보고 마는 동작들이, 발치의 낙엽은 못내 아쉽다.

 


 세워진 지 채 스무 해도 안 되는 고등학교를 나는 버티듯이 삼 년 다녔다. 그때 무슨 오기가 작동해서 그랬는지, 다들 성적에 맞춰 경주에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 나만이 타지에 나가보겠다고 당차게 선언했었다. 성적이 썩 나쁘지 않았던 덕분에 다들 내 선언을 수긍하였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저게 호들갑을 떤다고 속으로 날 흠잡았을 테다.

 내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으면서, 입학과 동시에 고등학교는 내 하루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입시’라는 명목 아래 기상시간부터 취침시간까지 모든 일과가 정해져 있었고, 그것을 어기는 즉시 회초리가 내려졌다. 결국 나는 기숙사 방 침대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음 날에 대한 각오를 다져야만 오늘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이듬해 봄, 교정에 기쁘지 않게 핀 벚꽃을 보고서야 소중한 것들이 더 이상 가물거려서는 안 됨을 깨달았다. 나는 빨리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아빠, 엄마. 그러니까 나 다시 경주로 전학 보내줘.”

 

 한 달에 딱 한 번 주어지는 기숙사생들의 외박 날, 나는 아빠한테 뺨을 한 대 맞고서 학교로 되돌아와야 했다.

 


 또 복도를 지키고 있을 감독 선생님 눈을 피해 비 오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균열 하나 없는 아스팔트 교정이 요란스럽게도 빗물을 튕겨내는구나 싶다가, 널브러진 낙엽 위로 두 귀가 모여들었다. 품었던 각오들을 내려놓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젖은 낙엽의 신세이니, 이젠 나그네의 보통 걸음에 부서질 수조차 없겠구나. 그때 당장은 알지 못 했다. 책상에 앉아 교실 안을 견디는 내 신세 또한 그것과 별 반 다르지 않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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