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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준 Sep 08. 2015

스티브잡스보다 좋은 발표

 




 국문학과 전공 수업 시간, 긴 머리를 푼 여학생이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 까지는'을 낭송했다. 도저히 용기가 안 나는지 칠판 앞에 서서 몇 초간 볼을 붉히던 그 애는 첫 구절을 읊으며 목소리를 떨었다. 맨 뒷줄에서 듣는 내 귀가 다 수줍어 졌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

 

 문득 생기는 감정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가 저 여자아이에게 참 소중한 시구나 라는 것이다. 떨리는 입술은 단 한글자도 허투루 뱉지 않았고, 붉어진 두 볼도 이 시와는 참 잘 어울렸다. “뚝”하고 떨어지는 모란을 곱게 두 손으로 받아 내고 있는 맘 여린 소녀가 생각났다.

 그리고 시가 읊어지는 내내 여학생의 시선은 교실의 허공을 향해 있었다. 책상에 앉은 한 남학생은 의아한 듯 그 시선을 좇다가 아예 등 돌려 교실 뒤쪽을 훑고 있다. 혹시 교실 뒤에 무어라도 있나 싶은 신기한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속으로 그 남학생의 머리에 꿀밤을 놓아 주었다. 단지 눈으로도 시를 읊을 줄 알았던 여학생은 허공 가운데 있는 모란 잎들을 보는 중이었다.

  


  .....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시가 끝난 다음에도 몇 초간의 떨림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학생 혼자가 아니라 교실에 앉은 여러 명이 함께 느끼는 떨림이었다. 그 떨림들은 소박한 박수갈채로 이어졌고, 여학생은 흐뭇한 미소를 한번 지어 주었다. 소녀가 두 손으로 받아 내던 모란 잎들은 그제야 마음 놓고 흙으로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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