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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준 Sep 22. 2015

안정기

 




 내 친구 만수에게 “행님” 하지 않고 자꾸만 “형” “형” 하는 게 미심쩍어서  “혹시 그쪽 고향이 어디세요?” 물어본 게 화근이었다. 同鄕인 걸 알자마자 여름 논에 통발 놓듯 은근슬쩍 내게 말을 놓던 이 녀석. 알고 보니 사는 곳도 대연동으로 같아서, 이제는 내 자취방을 아무렇게나 드나든다. 미꾸라지한테 이 논이 뉘 집 논인지 알게 무엇이냐. 

 둘 중 누구의 자취방도 아니라면 녀석과는 주로 편의점에서 만난다. 각자의 방에서 공평하게 떨어진 지점에 자리한 편의점 하나. 비록 찻길과 마주하고 있지만 편의점 앞에 놓인 테이블은 밤 맥주를 즐기기에 어쩐지 알맞다. 오늘 밤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 시간 우리 고향 慶州의 모습은 어떨까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익숙해진 타향살이의 외로움에 대해서까지. 어쩌면 대학가의 모든 술집들을 피해 녀석과 나는 여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는지도 모른다. 시시콜콜한 이야길 나누고자 하는 게 아니므로 우리는 가장 시시콜콜한 편의점으로 숨은 셈이다. 한참 뒤, 거머쥔 맥주 캔의 무게를 저울질조차 못하게 되었을 무렵, 역설적이게도 그때서야 우리가 쌓아 올린 이야기의 무게를 느낀다. 녀석과 나는 동시에 이곳을 일어서기로 한다. 

 도착한 녀석의 자취방에는 어느 구제 옷가게를 연상시킬 정도로 옷들이 너저분하다. 차마 말로 표현 못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갑자기 손빨래를 시작하는 녀석. 왜 하필이면 손빨래냐 물으니까, 오래전부터 세탁기가 고장 나 있었단다. 의리 없이 혼자 캔 맥주를 들이키면서 욕실 안 녀석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 위태위태한 몸짓이 술 버릇처럼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왜일까?

 나는 세탁기를 믿는다. 지금 멀끔한 내 옷도 오늘, 아니 어젯밤 세탁기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탁기로는 도저히 빨 수없는 무엇인가 있다는 걸 안다. 술에 취해 손빨래라도 하는 녀석을 보자니 안쓰럽다. 내가 아는 녀석에게 그 무엇이란 외로움일 확률이 크다. 녀석이 그건 아니라 해도 할 수 없다. 이미 나는 맥주 캔을 꽝 내려놓았고 일어서진 않았지만 욕실까지 다 들리게 소리쳤다.

 


 “정기야 형 집에 가져가서 세탁기 돌리자!”














같은 경상도지만, 慶州는 “행님”대신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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