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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준 Sep 30. 2015

3호차 11호석

 




 조금 둘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이번에도 나는 버스 대신 기차를 택했다.

 “다음 분요.”

 “네, 경주 성인 한 명이요…….”

 표가 나오기 전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매표소가 내어 놓는 떨림이란 게 있다. 목적지까지 얼마큼 편안하게 가느냐가 바로 지금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매표소는 떨림이 묻은 열차표 한 장을 내밀었고, 두 손이 움직이기도 전에 내 두 눈이 얼른 그것을 받아 든다.


 ‘3호차 11호석’


 홀수 번호다. 내심 기대했던 창 가 열 말이다. 나는 한 손으로 건네받던 열차표에 재빨리 나머지 한 손을 보태어, 고마움과 공손함을 동시에 표현했다. 이제 매표소 창구를 나와 마음 놓고 열차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미리 인기 있는 자리를 예매해 둔 극장 손님처럼 발걸음이 당당해졌다.

 철도는 레드 카펫처럼 누워서 5분 넘게 열차를 기다리고만 있다. 그때,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불빛이 호사롭다. 사람들은 ‘적당히’ 늦게 도착한 열차를 더욱 열렬히 반기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들과 섞여 열차에 오르며, 조금 먼저 와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시외버스를 떠올렸다. 

 열차 칸 내부는 몇몇 사람이 서서 가야 할 만큼 그야말로 만원이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작별할 사람도 없으면서 곧장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누군가가 다른 칸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들고 서 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음에도 계속 손을 흔드는 까닭에, 그의 인사가 나의 창문에도 잠깐 스쳤다. 손짓은 잘 가라고 보내주지만 서 있는 모습이 싫은 내색 못하고 가을을 떠나보내는 허수아비 같아서, 열차가 기왕 늦은 거 조금 더 늦어도 됐는데 하는 아쉬움마저 들었다. 그러는 동안 내 옆자리엔 어느새 아저씨 한 분이 와서 앉아 계셨다. 

 열차 속도가 빨라지면 속도가 없는 창문 밖이 더 잘 보인다. 파도가 센 탓에 한여름에도 사람을 못 만났을 외로운 바다, 어둔 골목에 수명이 다 되어 가는 어느 가로등의 호소……. 돌보는 이 없을 저 풍경들은, 괜찮다면 열차 어느 칸 구석에라도 같이 태워 가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눈으로만 풍경들을 태워 보다가, 창유리로 옆자리 아저씨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창가 자린 비록 아니지만 아저씨도, 언젠가 열차 밖으로 느꼈던 감정이 아스라이 남았을 테지. 

 바깥 풍경을 아저씨께 양보하고자 나는 엉덩일 살짝 반대로 틀어 열차 안을 둘러보았다. 앳된 소녀들이 좌석을 돌려 자기들만의 수다 방을 만들어 놓은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통로에는 선 채로도 편안히 책을 읽는 한 청년이 있고, 대화 삼매경에 빠진 저 아주머니 둘은 오늘 조우한 옛 친구 사이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곳, 저곳 담느라 지쳤는지 갑자기 두 눈 가득 졸음이 밀려온다. 스르륵 눈이 감겨 버렸다. 

 눈 떠보니 밖으로 기와집들이 하나 둘씩 지나가고 있다. ‘경주역’이 다 와간다는 신호이다. 이내 열차와 열차 차창 밖의 속도가 같아졌고, 나는 역에 내려 크게 심호흡 한 번으로 남은 졸음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몇 걸음 걷는데 다음 역마저 늦어선 안 되겠는지 열차가 벌써 출발을 한다. 열차와 내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걷는, 짧은 몇 초 동안이었다. 이제는 내가 열차 안 누군가의 창밖 풍경이 되어 있었고, 나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짐에 등이 뜨끈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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