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통찰 씨리즈
* 이따금 똑똑 모먼트가 찾아온 순간을 기록합니다.
나는 2019년 계획을 12개월째 세우는 중이다.
자기계발서의 한 문장 같지만 그냥 못한 거다. 세워야지 세워야지 하면서 미루다 보니 어느새 12월이 되었고 아마 오늘도 12월 계획, 주차별 계획, 오늘의 계획을 세워야지 마음만 먹다가 아무것도 못하지 싶다.
지난 주말 친구 A와 에이 컵 오브 커피를 한잔했다. 나는 평소처럼 허쓸에 대한 욕망과 그 허쓸할 수 없는 바닥인 에너지와 그로 인해 생기는 괴로움에 대해 토로했고, A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계획을 세워도 다른 일을 먼저 하게 되면 그건 네가 그걸 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럴 땐 그냥 쉬어. 몸이랑 마음이 편해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려던 걸 하게 돼."
허쓸뽕에 취한 나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왈왈왈 뭐라도 해야지 변수가 생기지! 왈왈왈" 하면서 짖었지만 초연한 표정의 A는 이렇게 응수했다.
"그 강박을 내려놔야 해."
집으로 돌아와 다시 노트를 펼쳐서 12월 달력을 그렸다. 그리고 허쓸하게 계획을 세우려는데... 갑자기 냉장고에 든 대추틈메이로가 생각나서 한 그릇을 먼저 담아왔다. 이내 베란다에 있던 귤이 혹 얼진 않을까 생각하며 두어 개 꺼내려는데 바닥에 무른 귤 하나가 곰팡이를 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친구를 격리하고 주변 귤들을 구조해 들고 나와 대추틈메이로 옆에 놓았다. 이제부터 계획을 세우기 전에 웅장한 BGM이 필요할 것 같아 유튜브로 괜찮은 음악을 틀었다. 유튜브를 켜다 보니 이왕 계획 세울 것 엑셀로 정리하면 좋을 것 같아 엑셀을 켜려다가 옆에 있는 LOL을 슬쩍 눌렀다. 게임할 생각은 아니었고 그냥 눌러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2시였고 계획은 자고 일어나서 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왜 나는 계획 세우기를 미루는가 하고 말이다. 왜 께임을 해서 시간을 낭비하는가 하고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대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 것은 2010년이 마지막이었다. 재수생이던 나는 노량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일 아침 번호를 매겨가며 빡빡한 하루 목표를 세우고 8할 정도 실천하며 1년을 살았더랬다.
그 이후로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까닭은 그때처럼 힘들게, 열심히 나와의 약속을 지켜갈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일이 너무 귀찮고 고된 일이란 걸 알기에 시작도 전에 미리 포기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포기에서 죄책감을 얻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2020년 새해 계획도 언젠가 세우고 싶어질 날이 올때까지 그냥 쉬면서 내 몸과 마음이 지금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겠다 마음먹었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당위와 목표들은 어쩌면 나의 강박들이 선택해온 것들의 결과는 아닐까 싶다. 쉬지 않고 무언가 해야만한다는 강박은 나에게 성장도 가져다주지만 한편으로는 하지 않았을때 죄책감과 피로감을 준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냥 나를 좀 두어야겠다.
쉬면서 나의 속도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