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비판을 잃었고, 다시 찾을 것이다.
뭐라도 쓰기 8일차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얼까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결론은 나지 않지만 하나 찾은 건 바로 비판하는 능력이다. 무엇이 별로거나 시정사항이 있어도 묵인하는 습관이 몸에 배인 것이다. 그렇다보니 매사 결정을 보류하고 미루다가 좋지 못한 선택을 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일잘의 기본은 기한 내에 혹은 기간 보다 앞서서 일을 탁탁 쳐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건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하는 것이 있어서 일이 밀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공백의 시간들. 멍때리면서 나의 잘못과 나의 실수와 나의 무능력을 반추하는 멍때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무용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로딩이 걸리지 않으면 무언가를 시작하기가 어렵다. 그러다가 문득 어제 밤에 마찬가지로 뒤늦은 마감을 하다가 이 모든 악순환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특정지을 수 없지만 내가 짚은 부분은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 것 같다. 나를 당당히 내세워 실력을 증명하고 동등하게 맞춰가야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관계가 형성될텐데, 이직을 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것이 몇달 째 나를 발목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만두고 좋은 곳으로 갈거야! 하는 긍정적인 생각이 뒷받침된 이동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는 오너로부터 도망치자에 가까웠다. 행동이 느리고 매사에 무딘편이라 영리하게 도망치기보다는 역풍을 온몸으로 맞는 삶을 살아온 나한테 도망은 처음이었다. 그렇다보니 회사 동료와 친구들 어느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배신자, 도망자, 변절자 같은 단어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신뢰를 잃은 사람. 언제든 떠나갈 수 있는 사람. 나는 새로운 곳이나 원래 내가 속한 곳이나 어느 쪽이든 이대로 가면 내가 짤리겠다. 나는 버림받고 말거야! 하는 식의 재난 영화에서 멘탈 터져서 헛짓거리하다가 가장 먼저 죽는 캐릭터에 나를 이입하고 있었다. 행동과 생각이 느려진 것은 전회사에서 날아간 멘탈, 이를테면 번아웃과 약간의 우울증으로 찾아온 몸의 약화인 것이지 내가 집단 내에서 퍼포먼스를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고 나를 버릴 거야라는 생각으로 엮일 문제는 아니었다. 몸과 마음은 따라주지 않고, 내가 해야할 일을 제대로 못하니 버림받을 것 같아 일을 그르치는 패턴이 반복되니, 점점 나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결론으로 내가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떠나야겠다는 결론으로 생각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 나쁜 쪽으로 생각하는 까닭은. 다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고 싶은 마음. 여태까지의 나를 지우고 새출발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나의 후진 과거들을 리셋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의 폼이 많이 떨어져 나의 무능함을 보고싶지 않기 때문에.
원인을 알았으니 답은 정해져 있다. 폼을 올리는 것. 도망치지 않고 맞서서 괜찮은 작업물을 내는 것. 그리고 나의 입지와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조건을 달지 않는 것. 나 스스로를 당당하게 세우고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더디더라도 조금씩 만들어가야 한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친구들이 내게 진즉에 해줬던 이 말들을 그때는 듣을 수 없었다. 나 자신에게 가장 모질게 군 건 나였다. 비판의 화살을 나에게만 돌리지 아니하고, 나의 주장을 할 수 있게, 나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비판을 다시 찾을 것이고 용기를 낼 것이고 그리고 우열감 느끼지 않고 동등하게 우뚝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