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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Jul 28. 2016

와 닿지 않음과 청춘에 대하여

진지를 머금은 개소리 한 마당


와 닿지 않음과 청춘에 대하여


넌 아직도 와 닿지가 않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어.
학생이라 생각하고
방학이라 생각하면 안 돼.
와 닿지가 않으니까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거야.


  집에서 기거하며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계획도 생각도 없이 뒹굴거리니까 갑갑한 맘에 나에게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나보다. 나는 '그 말'이 와 닿지가 않는다.


  이런 류의 뻘글은 대개 합리화를 기반한 자기변호거나 자존감이 이미 너덜거리는 상태로 필터링 없이 써재끼는  징징거림일 가능성이 크다. 애석하게도 나는 둘 다 인 것 같다. 오늘도 반복될 비슷한 레파토리를 피해 시원한 카페로 피신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집이 따뜻하기에 상호 짜증지수도 올라가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와 닿는다는 말로 돌아온다. 와 닿다. 와 닿다. 와캇다. 와 닿다는 모양새에서 보듯이 둘로 분리가 된다.


'와' 랑 '닿다'의 결합이다.


뜻으로 보면 (오다) + (닿다)


일단 오고, 온 것이 무언가에 닿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국어수업이 되는 것 같아 대충 쓰겠다. 난 문법을 잘 모른다. 내맘대로 정리하는 것이기에 믿으면 안 된다.)

 

 (무엇이) 오고 (무엇에) 닿는가.


  일반적으로 와 닿다는 말은 '마음에 와 닿다'에 쓴다. 대개는 위에 쓴 (무엇이)가 생략되기 마련이다.


  (00 하는 것이 혹은 00이) 마음에 와 닿다.


  이때의 의미는 (괄호)안 내용에 대한 동의가 기본전제다.(드디어 문법이야기가 끝났다.)


  문제는 (괄호)안의 내용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공유하는가에 있다. 내가 '문제'라고 한 것부터 예상은 했겠지만 대부분은 서로 딴 얘기를 괄호안의 내용으로 생각하며 대화하기에 말이 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안다. 나에게 무엇이 와 닿지 않은지를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취업' 이다. 알면서도 와 닿지는 않은 나는 인생의 쓴맛을 아직 본 적이 없어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더 와야 내 맘에 닿을지는 모르겠으나 와 닿다 뒤에 꼭 따라붙는 말.


시간보내다가 해야지 생각하면 늦어. 경쟁자들은 다 앞으로 뛰어가는데 말야...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죄인이 된다. 뛰어야하는데 멍때리고 서있는 죄. 방향을 못찾고 헤매는 죄. 아무런 계획도 성취욕도 없는 죄. 태어나서 나의 몫, 나의 구실을 하지 않는(혹은 못하는) 죄. 그냥 이거저거 다 죄.

  무슨 종교를 믿는 건 아니지만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원죄론이 새삼 고마워진다. 나만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으니 말이다.


  중역죄인인 나는 역으로 나에게 묻는다. 이렇게 죄를 지으며 엇나가며 살아왔는데 그렇다면 나는 잘못 살아온 건가? 그건 아닌것 같다. 적당히 아등바등 살아왔으니 스물여섯까지 자살하지 않고 지금 이순간 글을 쓰고 있지아니한가.

  이 정도로 자존감을 자가치유하고 있으면 한 방 더 들어온다.


무슨 배짱으로 그러고 있어?
니가 돈이 있어 빽이 있어 능력이 있어?


  나는 또 무너진다. 돈도 빽도 없다. 대학 전공도 문과, 그것도 어디 취업엔 쓸 데가 없는 국문과라 뭐라 할 말도 없다. 나는 입을 다문다. 그리고 조용히 전시용 토익책 비스무리한 걸 가방에 넣고 집 앞 카페로 도망치듯 나온다. 그리고 그때부턴 죽치고 앉아 뻘글을 쓰거나 못그리는 그림을 그린다. 이 것이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갑갑허니까 또 갑갑허니까.


  까페에 혼자 앉아 멍때리며 '나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존재는 '의미'가 있는가. 나는 어떤 달란트를 갖고 태어났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뭘까. 내가 잘 하는 일은 뭘까. 그런게 있긴할까.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마냥 '이 나이때는 해서는 안되는 늦된 고민'을 한다.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아 나만 텅빈 의자를 앞에두고 줄 없는 노트에 의미없는 줄이나 찍찍 긋는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멍을 때리는 것이다.


  그나마 믿는 구석이 있긴했다. 나는 내가 글줄깨나 쓰는 줄만 알았다. 남의 주목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받아본 적도 없는 평범한 나에게 '글쓰기'는 나를 남과 구분짓게해주는 특징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도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분야였다. 그러나 이 특징은 결과물로 '따란ㅡ'하고 드러나지 않는다. 미술을 하면 그림이 남고 연주를 하면 소리가 남고 운동을 하면 근육이라도 남으련만 글쓰기해서 남는 '글'이란 건 소수에게는 밥벌이 수단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나같은 사람들에겐 자위용 여가 정도밖에 평가되지 못한다.


  글이라는 것이 쓰는데 시간과 노력의 투자대비 효율이 좋지는 않다. 아니 안 좋다. 또한 '본 업'이 있고 '시간 남을 때' 해도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기에 내가 사회의 인정, 이를테면 공모전을 통한 등단같은 것을 하지 않는 이상 표도 나지 아니한다.


  이젠 의문이 든다. 어쭙잖은 재능만 믿고 계속 붙들고 있어도 될까? 신춘문예 40년 떨어지고 폐인이 되어 매일 소주나 먹는 아자씨가 되는게 아닐까. 기약이 없으니 더 갑갑허다. 싹 포기하고 뒤늦게라도 남들을 따라가려니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한번은 다니던 창작학회 담당 교수님께 '직업으로의 나의 달란트'에 대해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그저 견디'말씀을 하셨다. 그 후 1년쯤 지나서 공모전을 앞두고 한 번 읽어주십사하고 메일을 보냈을땐 '어쩌면 청춘을 걸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답을 주셨다.


  어쩌면 나는 청춘이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청춘이란 게 뭘까 도대체.


네 나이땐 뭐라도 할 수 있어! 내가 네 나이만 되었어도...  로 시작되는 말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시키는 대로 잘 살아왔고 남들보다 뒤처지지않을 정도 페이스로 뛰어왔다. 마냥 놀아본 적도 없고 적당히. 그래 적당히 살았다.

  무언가에 미쳐서 죽자고 덤벼본 적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어본 적도 없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불광불급의 포부도 없다. 어찌저찌 모나지 않게 살아왔는데 그게 너무 힘든데 나는 힘들면 안되는 존재인가 보다.


  지친 것 같아요. 좀 쉬고 싶어요. 라고 말하면 여태 쉬었잖아. 지금이 여유부릴때야? 이라는 답이 돌아오는데 오리걸음으로 골대찍고 오기 하고와서 헥헥거릴때 많이 쉬었지? 한 바퀴 더돌아! 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처럼 배신감을 느낀다. 더 한 배신감은 시 지금이 키는대로 잘하고 엇나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건만' 이 모든 결정은 사실 네가 한 것이 아니냐고... 네가 한 행동에 책임지라고 반문이 돌아올때다.

  

  청춘은 배신감인건가. 나는 언제쯤 맘 편히 여유를 부릴수 있는건가. 책임질 것이 없는 게 청춘인가. 인생에 청춘이란 구간이 있긴한걸까.


  내 나이가 와 닿지가 않는다. 어쩌면 살아온 관성이 너무 익숙해져서 누군가 청춘을 '허락'해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비관과 결정장애는 이렇게 징징거림 속에 또 한 번 덩어리져서 몸에 쌓일 게다.


  나는 까페에 있다. 지금도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에 닿지못하고 '몰래' 글쓰고 팟캐스트 녹음하고 그림그리면서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다.


  여전히 와 닿지 못한다.(여전히 뜨거운 맛을 못봐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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