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내 안의 선을 다시 그어가는 일 | 이요마
이 책을 처음 잡은 건 2021년이었다. 친구 결혼식에 가려고 부산가는 열차를 타고 1부까지 읽었고 한동안은 다시 이어 읽지 못했다. 왜 그런고 생각을 해보니 여력의 문제였던 것 같다. 최은영 작가가 그려내는 감정을 받아들일만한 내면의 공백이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2년이 지나 완독까지 갈 수 있었다.
<밝은 밤>은 지현이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희령의 천문대로 직장을 옮기면서 시작한다. 단순한 이직이라기보다는,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고 마음을 정리하며 새로운 거처를 찾은 것이다. 희령에 연고가 있던 건 아니다. 다만, 어린시절 지금은 엄마와 관계가 틀어져 십수년간 보지 못했던 외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정도. 이사를 마치고 거리를 걷던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사과를 건네며 말을 건다. 바로 지현의 외할머니였다.
지현은 종종 할머니댁에 가서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우리 엄마(증조할머니)'와 닮았다며 사진을 보여주는 일을 계기로 증조모부터 시작하는 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일제 강점기시절부터 개성살이, 6.25 피난을 거쳐 희령에 도착하기까지의 이야기 속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있었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를 거치며 지현에게 도달한 이야기는, 그저 옛이야기가 아니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여성의 수난사이자,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간 개인사이자, 사랑으로 버텨온 가족사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지현은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환멸과 슬픔에서 스스로 빠져나온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이혼 후 내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은 남편의 기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의 결과이기도 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보니, 그중 나를 더 아프게 한 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사람에게는 지켜야할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에게 내주지 말아야할, 타협의 여지가 개입할 수 없는 그런 영역말이다. 그저 갈등을 회피하고 싶어서,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하나 둘 열어준 내 안의 선을 타인들은 별 생각 없이 헤집어놓고 떠났다. 내가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어.'라고 말하기 시작했던 건 '내 영역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거 같다. 그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내 주변의 어떤 사람도 악의를 품고, 내 바운더리를 침범한 건 아닐 것이다. 하나 둘 문을 열어준 건 나였고 '얘는 이래도 되는가 보다' 하게 만든 것도 나였다. 열 번 악한 일을 하다가도 한 번 선한 일을 하면 개과천선했다는 말을 듣지만, 그 반대는 '변했다'는 말을 듣는다. 난 그런 평가와 시선이 그렇게 무서웠던 것 같다. 나 자신을 그렇게 방치했던 것 보면 말이다.
<밝은 밤>을 읽는 내내, 자신의 모든 영역을 선긋지 않고 타인에게 내어줬다 황폐해진 지현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차차 주변 사람들의 노이즈들을 제거해가며 자신의 선을 다시 그어가는 과정을 보며 작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세상의 명분이, 가족의 명예가,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것으로 내가 죽는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어주지 않아야할 부분에는 타협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좋은게 좋은거지가 만든 거지같은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최은영 작가의 소설은 진하고도 깊었다. 내면의 공백이라고 말한 그 모호한 느낌은 '상처를 직시하고,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왈칵 감정이 쏟아질까봐. 그러면 약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애써 피해왔던 그 시간들이 사실은 쥐어짜내서라도 냈어야 하는 시간들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뼈아프다. 또 내 자신을 기만하는 순간이 오면 다시 펼쳐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