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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Sep 13. 2023

프롤로그. 우울이 처음 찾아왔을 때

좋아하는 것이 마땅히 없어서요

* 사진 출처: unsplash.com

우울이 처음 찾아왔을 때


1년 전 여름, 나는 회사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병가를 냈다. 병명은 중등도 우울에피소드와 공황장애였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죽은 듯이 집에서 잠을 자는 시간이 이어졌다. 자고, 일어나서 컴퓨터를 조금 보다가 다시 자고, 또 자고, 일어나서 또 자는 일이 반복되었다.


우울증 하면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줄만 알았다.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정신의학과에서 처방받은 약에 포함된 수면제 때문이었는지 몽롱-하고 퀭-한 상태로 멍을 때리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머릿속에 노이즈가 잔뜩 끼어있는 이상한 느낌. 무얼 떠올리려 해도 생각나지 않고, 무얼 하고 싶지도 않은 무(無)의 상태에 가까웠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는 공허한 마음 속에서 때가 되면 병원에 가고,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그것이 내 인생 스케쥴의 전부였고,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나아진다거나 달라진다거나 극복한다는 개념이 머리에 떠오른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후였다.


회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당시엔 끝없이 부정했지만 나중에서야 그곳도 이 병의 원인 중에 하나였구나 늦되게 깨달았을 뿐이다. 병가 기간이 끝나고나서 나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짐을 들고 나왔다. 내 공백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채워졌고(그래서 동료들에겐 미안했다.), 내 존재는 그곳에서 지워졌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돌면서 후련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안녕히계세요, 건강하세요."가 끝이었다. 몇 년 간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눈물이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지만 희노애락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회사 생활이 끝났다.


집에 돌아와서는 몇 년간 해오던 사이드 프로젝트, 취미로 하던 팟캐스트, 친구들과의 카톡방까지 인사를 하고 다 나와버렸다. 그렇게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생활은 더욱 단조로워졌다.


한낮에 일어나서,

대충 밥을 먹고 산책을 나선다.

다시 돌아와서 잔다.

8시 넘어서 일어나서 책 한두 권을 들고 동네 무인 카페를 간다.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기억나는 부분과 인용하고 싶은 부분, 감상에 대한 기록을 비공개 인스타에 남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새벽까지 유튜브를 붙잡고 있다가 잠든다.

상담과 병원 가는 날을 제하면 거의 이렇게 보냈던 것 같다.


그나마도 정신을 놓고 있는 와중에도 두 가지만은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 스스로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하나는 마지막 남은 조바심으로 이 시기에 본 것들을 어떤 마음으로 읽었을지 기록해두자는 생각에서 (지금은 공개로 돌린)비공개 인스타 계정(instagram.com/hako_eyoma)에 쌓아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을 용기는 없어서 그쪽 선택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참 다행이다.

평평하고 단순한 일상의 기록이 쌓여갈수록 앞으로의 내 삶은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 선생님은 내게 이런 뉘앙스로 말씀하셨다. 

"요마씨. 우울이나 공황은 완치가 없어요. 계속 함께 가는 거에요."

그래서 선생님도 공황의 전조가 오면 '아 또 왔구나.' 하는 느낌으로 직감하신다고 말을 이어갔다. 그때의 나는 이 말에 끄덕였지만 이해는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처음이었으니까. 이 이상한 감정과 기분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으니까.


시간이 한참지나 요즘에서야 다시 그 '전조증상'에 대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울증 자가진단 테스트에 있을 법한 것들. 


이를테면   

    매사 흥미가 없고 즐거움이 없다.  

    잠을 잘 못 자거나, 식욕이 떨어진다.  

    피곤함이 가시질 않는다.  

    책 읽기나 TV보기 같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호불호가 사라진다.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짜푸리고 있다.  

같은 것들이 동시에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는 느낌. 



애석하게도 이런 증상들은 전부 '결과'다. 내 몸에 이런 징후가 나타났다면 그때부턴 대응만이 답이다. 

처음 이 현상들이 찾아왔을 때는 나는 잘못된 대처를 했더랬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답을 구하려는 게 실수였다. 


'왜 되던 것이 안 되지? 내가 노력이 부족했나? 무얼 잘못했나?'부터 시작해서 '난 왜 이렇게 살았지? 무얼 그렇게 잘못했지?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지?'로 자문자답은 점차 취조를 하듯이 원망이 섞인 자조로 넘어갔고, 종국에는 날카로운 자기비난만이 남았다.


'다 내 잘못이야. 난 쓰레기야. 내가 쓰레기니까 주변에 피해를 주는 거야. 나는 존재의 의미가 없어.'

스스로의 편이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 박하고 모질다. 단 한 번도 나 자신에게 위로를 하거나 좋은 말을 해본 적이 없기에, 방법을 모른다. 내 몸이 위기의 상황에 처했을 때도 '고생했어. 힘들었구나.' 한 마디보다도 습관적으로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정신차려. 너만 힘들어? 세상 사람들 다 힘들어.'라는 내면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냥하게 말하면서 나한테만은 이렇게 뾰족하게만 말하는 걸까.'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30여년간 살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채찍질은 했을지언정, 나 자신을 존중하고 내 편이 되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에게는 한없이 상냥한 말을 하면서 왜 스스로에게는 뾰족한 말만 할까. 이 화두는 상담을 하면서 조금씩 실마리를 찾아갔지만 끝내 명백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 성장 과정, 결핍, 욕망 수많은 단어들이 나왔지만, 그것들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중요한 것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로 스스로를 바꿔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오예! 

이런 해피엔딩이라면 좋았으련만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이 한두 번 생각한다고 마인드셋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칭찬을 하고, 남이 해주는 칭찬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감사합니다'하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 나를 긍정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식으로만 살아간다면 더 나아졌겠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오랜만에 '전조증상'이 다시 찾아왔다. 저번주 주말부터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데도 무언가에 도망이라도 치듯이 계속 침대에 누웠다. 일도 안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잠이나 자는 내가 죄스러웠고, 그 죄스러운 마음으로부터 또 도망치려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러다보니 다시 선잠을 자고 악몽을 꾸고 잠을 설쳐 피로하고 악순환이 반복되더라.


잠 밸런스가 무너지니 다음으로 무너진 건 인풋이었다. 읽고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재미없고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드라마든 유튜브든 책이든 시작하는데까지도 준비가 많이 필요했고, 잡아도 길게 집중하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할 수 있는 건 공포 라디오나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강제로 인풋을 당하며 자거나 멍때리거나 하는 것 뿐이었다.


인풋이 무너지니 스스로를 부정하는 마음이 들며, 매사에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어지는' 호불호의 실종이 찾아왔다. 재미있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마땅히 없으니 그냥 매일매일이 다시 플랫하게 지내던 그 시절처럼 공허하게 변해갔다. 일의 능률이 떨어진 건 물론이고, 내 생각이나 의견을 혹은 취향을 말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처럼 전조증상들은 서로가 서로와 얽혀있어서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사람을 무너뜨린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이미 한 번 무너져본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내 마음을, 마음 속의 욕망을 진득히 들여다보고 본 것을 바탕으로 아웃풋을 내면서 극복해보려는 시도다.

나는 이번에 찾아온 그것의 증상 중에 '호불호가 없어짐'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좋을 것도 싫은 것도, 미운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없는 공허한 상태에 나를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기꺼이 발버둥을 쳐볼 생각이다. 


우울해 보이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별 고민없이 '우울할 땐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해봐!'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다. 좋아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로 인지되지 않는, 좋아하던 일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이 말은 부담과 결격사유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일을 좋아했는데 왜 이러지?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난 쓰레기인가?' 하는 자문자답의 블랙홀에 빠질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일 하나 없다니 난 구제불능이야.' 같은 자기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두 경우 모두 내 경험에서 나온 말들이다) 타인의 조언을 통해 우울한 마음에서 짠! 하고 벗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필요한 건 역설적으로 스스로에게서 답을 구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해본 적 없는 사람이 자문자답을 통해 점차 부정적인 생각을 확대하는 것과 스스로에게 정답을 물어보고 찾아가는 과정은 '평가'의 유무라는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한발 떨어져 나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폄하하기에 문제가 된다면, 후자는 나 자신과 협력하면서 함께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이기에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깨닫고, 팔짱을 낀채 바깥에서 마음 속의 나를 비난하던 태도에서 녀석에게 손을 내밀며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고 제안하는 데까지는 꼬박 1년하고도 4개월이 걸렸다. 

이 시리즈에서는 '내가 마음 속 나와 함께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해 라이브로 적어가볼 생각이다. 중간에 샛길로 빠지거나 자빠지는 일이 있더라도 괜찮다. 어차피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제목이 '좋아하는 것이 마땅히 없어서요.'인 이유는 '우울할 땐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해봐!'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 늘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걸 좋아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볼까봐.'라거나 '좋아하는 것이 이제는 좋아하는 게 맞나 싶어서' 또는 '나 같은 게 그것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나 싶어서' 같은 많은 이유로 스스로를 제한한 것도 있다.


다시 마음의 위기 상황이 온 지금에선 그런 체면이나 인사치레 같은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좋아하는 것을 하다보면 호불호의 없음 문제가 해결될 터고, 다시 연쇄적으로 다른 증상들도 정상화 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다.


좋아하는 것들로 가능한 일상, 내게도 가능할까. 의심이 들지만 일단 시작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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