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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Sep 13. 2023

1. 내가 뭐라고에서 벗어나기 / 내게 상을 주면서

좋아하는 것이 마땅히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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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뭐라고...에서 벗어나기

우울증으로 감정이 마비된 사람에게 좋고 싫음은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좋든지 싫든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을 좋아하고 싫어한들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호불호를 나타낸다고 뭐 달라지나 싶어서. 어차피 (대부분 비관적인) 결말은 비슷비슷하고, 미래도 크게 기대되지 않는 상황에선 현재의 자잘한 디테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과거와 현재도 마찬가지다. 이미 지나간 일 곱씹어서 무엇하나. 지금 내가 뭘 한다고 크게 바뀔 것도 없는데. 하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플로우는 사람을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다. 


나는 한동안 이 플로우에 빠져 생활패턴이 망가지는 악순환에 갇혔다. 내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게 별로여서 잠으로 도피하고, 깬 시간은 다시 뭘 해보려다가 포기하고, 포기한 나 자신에 실망해 좌절하고, 다시 잠으로 도피하는 사이클. 시간이 흐르고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이런 마음이 든 까닭은 '좌절'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엇하나 이루지 못했고, 제대로 성공해보지 못한 나 자신이 보잘 것 없고 못나보였다.


원하는 미래를 제대로 그려본 적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허튼짓 안하고 성하게 잘 살아온 거 같은데... 근데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왜 이렇게 못났지?


그때의 우울한 마음의 근원을 쪼개보면 내 마음 속 불안이 느껴진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부족하다 생각하고, '무얼 꾸준히 열심히 해왔는데' 기대한 무언가가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 설사 바깥에서 나를 바라봤을 때는 한 분야에서 이룬게 많은 사람일지어도, 자신의 캐릭터가 확실히 있는 괜찮은 사람이어도 본인만 알지 못한다. 

과거의 나는 이 모든 것의 원인을 '나의 자질'이라 생각했다. 내가 못났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도 답이 없고, 무얼 시도해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거라고.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문제는 '원하는 미래를 제대로 그려본 적은 없었지만'에 있었다.


괜찮지 않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같은 말은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달리 말하면 같은 상황이라도 평가가 달라지는, 생각하기 나름은 말들이라는 뜻이다. 어떤 이에겐 최악의 실패가 다른 이에게는 작은 성공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다른 이에겐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바로 '기준'에서 온다.


스스로를 아무것도 안하며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열심히, 아니 열심히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위해 노력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그 과정이 버린 시간이나 없던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우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지우는 것일 뿐이다. 그럼 왜 이렇게 행동해야만 했을까? 내 기대에 충족되지 못했고, 지지부진한 짜투리 같은 결과물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내면에서 설정한 기준치가 높은 이들이 자신에게 엄격하게 굴곤 한다.


기준치를 조금 낮추면 같은 결과도 다르게 보인다. 과정들 또한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그냥 아무것도 안해서 망했어.'라는 말에는 '내가 뭔갈 하긴했는데 기대에 못미치는 결과가 나와서 남들에게 말하기도 못한 짜치는 것들이라 그냥 없던 셈 치기로 했어. 그 시간은 다 버린 시간이야. 나는 그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다 망했어.'라는 의미가 내포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말들은 모두 '평가'가 담겨있다. 그것도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 말이다.


한동안 인정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받아들인 사실이 하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 될 거란 확신이나, 무엇이라도 다 가능하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실패자 프레임을 공고화 하기 위해 의도적인 실패를 만든다는 점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뇌는 육신이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한 상태에 머물도록 시스템을 프로그래밍한다. 별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관성의 영역에 있는 말과 행동들은 우리를 '살던대로' 살게 한다. 살던대로 자기 비난을 하고, 일을 벌였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해 상처를 내는 게 역설적으로 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드는 방식인 것이다. 왜? 그게 살던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안 하던 일을 하는 것을 뇌는 위험이라고 간주한다. 원시시대에는 살던대로 사는 사람들은 생존하지만, 도전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안 하던 짓을 하다가 죽어갔다. 새로운 독버섯을 먹거나, 모르는 동물에게 덤비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본다거나. 그러나 2020년대에는 그런 극단적인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라는 종에 남겨진 습관처럼 시스템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내가 반복해서 실패를 하고 좌절하고, 그간의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건 '살던대로'의 세팅값이다. 똑같이 살면 똑같이 실패하고 상처받고 회복되면 다시 일을 벌이는 일을 반복할 테다.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물론 있다.


자기계발서들의 메카니즘이 바로 이런 '살던대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걸 해낸 사람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는 한다. 물론 감정적 무(無)의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화이팅! 미라클 모닝! 너도 할 수 있어! 같은 메시지를 주자는 말은 아니다. 이 메카니즘을 이용해 '우울'로 세팅된 지금의 습을 리부팅해야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 살던대로 살되 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 평가한다.

둘, 기대치를 유지하되 사는 방식을 바꾼다.

내가 택한 건 '살던대로 살되 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 평가한다.' 쪽이었다. 무얼 더 할 수 있는 에너지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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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상을 주면서 달라진 것들

상담을 받기 위해 서울에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스티커 하나를 샀다. 

어린이들이 착한 일을 했을 때 하나씩 주는 '상'이라는 글자가 쓰인 꽃모양 스티커였다. 계산을 마치고 문구점 문앞에 서서 스티커를 하나 뜯어 다이어리에 하나 붙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거르지 않고 상담에 나와줘서' 그뿐이었다.


이전이라면 돈을 냈으니까, 약속을 했으니까, 지켜야할 것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대치의 기준을 낮추고 '상'을 주자 기분이 확 좋아지더라.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주는 상을 남발(?)했다.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해서 상, 저녁 식사를 거르지 않아서 상, 귀찮아도 산책을 나서서 상, 카페에 나가 책을 한 장이라도 읽었으니 상, 그저 오늘도 잘 살아있어서 상... 나에게 상을 주고부터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다 의미가 되었다. 상 스티커를 받기 위해 청소를 하고,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는 날들도 점차 늘어났다. 삶의 패턴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잘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그냥 어린아이 다루듯 유치한 방법을 했을 뿐인데 30년 넘게 못 찾던 '의미'라는 걸 느껴간다는 게 참 묘했다. 조금씩 마음이 정상화 되어가면서 의문하나가 생겨났다. 진즉에 물었어야 했지만 하지 않고 미뤄오던 그 질문.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무엇이 나를 살게 만드는가.'

당연히 바로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살던대로'가 왜 잘못되었는지 핀트를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원하는 미래를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원해본 적이 없기에' 애초에 나에겐 목표의 기준이나 척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잘해도 잘한 것 같지 않고, 이뤄도 이룬 것 같지 않은 갈구의 상태만 남았고, 그나마도 미달성이라면 몇 퍼센트의 부족으로 달성하지 못했다는 체크보다는 그냥 실패로 치부했기에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차차 상 스티커를 주지 않아도 침대에서 벗어나 나를 위한 행동을 쌓을 수 있게 될 무렵부터는 넥스트 레벨에 대한 고민을 했다. 다시 과거처럼 '실패자 사이클'에 들어갈 것인가? 물론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내가 좋아하는 일로 가득한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에만 집중하자고 다짐했다. 그런 상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나, 살던대로 살지 않는다.

둘, 바라는 목표 지점을 설정한다.

당연하게도 둘다 녹록지 않은 해답들이었다. 내가 뭐라고...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겠어... 하고 쭈굴 모먼트가 찾아왔고, 에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생각하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무엇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학 합격하게 해주세요 이후론 거의 없던 것 같다. 누가 바라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하지 않았다. 왜? 글쎄... 나 같은 게 그런 걸 바라도 되나 싶어서... 내가 뭐라고... 그건 돈 있고, 재능 있는 애들의 영역이야... 마음 속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이유 같지 않은 이유들뿐이었다. 


'나라고 무엇 하나 바라면 안 되나?'

질문을 바꾸자 답이 명확해졌다. '아니! 바랄 수도 있지. 바라는 데 돈드나?'

나는 나 스스로의 천장을 제한해왔던 것이다. 주제를 아는 것, 바라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런 삶을 감내하는 것. 그게 나의 살던대로였다. 아마도 어린시절부터 쌓아온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을 게다. 바라고 욕심냈다가 포기하고 상처받기 싫어서, 괜히 나댔다가 사람들에게 낙인찍힐까봐. 말해놓고 못해서 쪽팔리기 싫어서. 그런 상상속의 이유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지금도 유효한가?'

아니었다. 내가 우울로 빠져든 건 결국 '내 영역'을 지키지 못해서, '나의 것'을 잃어가서, '내 것' 하나 없어서, 그리고 '내가 스스로 선택권을 포기해서'였으니까. 남이야 뭐라하더라도 살고볼 일이었다. 우울증 판정받고 퇴사하고 자유인이 된 마당에 더 볼 남 눈치도 없었다.


그럼 뭐부터 해보고 싶어?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 쉽사리 답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바람이라도 쐬러 갈까. 충동적으로 동해행 KTX 티켓을 끊은 것이 내 첫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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