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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Sep 19. 2023

4. 별 생각하지 않다보면 나는 사라진다

좋아하는 게 마땅히 없어서요

4. 별 생각하지 않다보면 나는 사라진다.


명색이 글쓰기 캠프였기에 이튿날에는 뭐라도 써야지 마음먹고 숙소를 나왔다. 콘센트가 있는 카페에 가서 글을 쓸 요량이었고, 이왕 동해까지 왔으니 바다가 보이는 카페면 좋겠다는 생각에 검색을 하던 중에 '묵호'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본 적도, 갈 생각도 없던 도시였지만 참 좋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꽤 많이 들었던 터라 큰 고민 없이 일단 묵호역 쪽으로 버스를 타고 넘어가면서 어딜갈지는 생각하기로 했다. 묵호시장, 항을 지나 가장 가까운 해변은 어달해변이었고, 마침 익숙한 투썸플레이스도 있다기에 그럼 가보자하는 마음으로 출발을 했더랬다. 


묵호역에 내려 시장까지 걸어가 아침 겸 점심으로 회덮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웠다. 네이버 길 찾기를 켜놓고 도보 30분이라는 말만 믿고 걷기 시작한 게 패착이었다. 내가 가려던 투썸은 차도를 따라 바다를 보며 찬찬히 걸으면 40~50분 정도면 나오는 곳이었으나, 최단거리의 효율을 지향하는 지도앱은 나를 언덕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 분명 바다 아니었나. 왜 자꾸 산으로 가는 걸까. 헉헉거리면서 경사진 언덕을 오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여행을 좋아했었지. 빙빙 돌더라도 정처없이 걷는 걸 좋아했었지. 그런 낭비되는 시간들을 사랑했었지. 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목표지향적인 인간으로 바뀌어있었다. 최단거리, 효율, 효용 같은 단어들은 나와는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돈을 벌어야 하니까. 사회 생활을 해야하니까 사람들 앞에서는 "아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여서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회사가 바라는, 동 나이대 사람들이 무릇 그래야만 하는 캐릭터를, 친구들과 견주어 해야될 것을 해야하는 나를 맞춰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건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나를 잃어간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꽤 많이 했던 것은 기억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되새긴다거나, 나만의 취향의 영역을 키운다거나,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날 내가 아닌 존재로 바꿔가도록 그대로 방치했다. 왜 방치했느냐면 답은 같다. '그냥 별 생각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음식점을 골라도 블로그를 검색하고, 새로운 여행을 가려도 유튜브로 예습을 했다. 힘들여가며 고민하고 동선을 짜고 실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민 없이 사는대로 살다보면, 남들이 짜놓은 프레임 안에 갇히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기본값은 남의 기준에 고착화되어 점차 '나'에 대한 고민이나 생각은 멀어진다. 그저 나에 대해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일이기에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나는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일상을 '나' 없는 시간들로 가득 채워왔고,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 번아웃-우울증-공황 트리플 콤보를 맞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無)의 존재가 된 게 아닌가.


끝도 없이 올라만 갈 것 같던 언덕이 점차 평탄해졌고, 지도 어플은 내리막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힘드니까 혼자 중얼거리며 내려왔다. '그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거지. 그런 거지.' 인도를 따라 걷다가 멀리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저게 바다인가. 정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수평선이 착시효과처럼 경이롭게, 그리고 광대하게 눈 앞에 펼쳐졌다. 그래. 그럼 그렇지. 나는 이런 것을 좋아했었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당장이라도 앞으로 넘쳐 쏟아질 것 같은 바다를 보았다. 나는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 그저 목적지를 찍어놓고 땅만 보고 걸으며 살았구나. 그 목적지도 내가 원해서 고른 것도 아니었고, 걷는 것도 남들이 걸으니까 걸어왔구나. 이렇게 멋진 의외성을 다 내다버리고 살아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런 경이로운 모습들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그 안에서 놀라움을 찾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쓸모도 없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자학의 시간을 지나며 몇 달 만에 떠올린 '하고 싶은 일'이었다.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가니 모퉁이를 돌아 얼마 안 가 목적지인 카페가 나타났다. 무얼 쓸지, 어떤 걸 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었지만 어딘가 충만한 기분으로, 의기양양한 기세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설령 시간을 낭비하고, 실패해서 자빠지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냥 뭐라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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