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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Dec 13. 2023

[한국문학] 각자도생 시대, 디스토피아 속 인간

김준녕,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unsplash.com

각자도생의 세상의 디스토피아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 우주로 향하는 SF의 상상력에도 글을 쓰는 작가의 두 발은 현재에 닿아있기에, 현실과는 온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 요즘 세상은 어떠한가. 요 몇 년 사이에 가장 많이 들었고, 나도 쓰는 말은 '각자도생'이었다.

각자도생과 개인플레이의 현실을 넘어보려고 여러 작품들에서는 '연대'하는 이야기를, 공동의 공간에서 사람들을 '다정'하게 품는 이야기를, 또 현실을 '역전'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PC함이니 안온한 마취라니 하는 비판적인 시선들도 따라붙었지만 그것이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바라는 바람이 담긴 판타지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뉴스가 픽션보다 재밌던 2016년 겨울과는 다르게, 요즘은 픽션보다 잔인한 일들이 사회 전방위적으로 벌어지는 통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을 감고 싶은 시절이다. 사회적 안전망을 기대할 수 없고, 개개인이 알아서 생존해야하는 지금 시기이기에, '안전 공간' 서사과 다른 의미로 '디스토피아' 서사는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 같다.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시뮬레이션. 그 최악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도덕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하는 타이밍이 아닌가 싶다.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은 기후위기와 식량난으로 전 세계적인 대기근이 찾아온 최악을 가정한다. 아사자가 속출하고, 살기 위해 가족을 잡아먹는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유일한 희망으로 쏘아올린 우주선에선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 이 글은 개인적인 감상이며,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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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읽은 콘텐츠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은 김준녕 작가의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으로 손을 놓을 수 없게 하는 몰입감이 일품인 SF소설이다. 망해가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바깥 막을 향해 날아가는 과정 자체도 재밌지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고민도 할 수 있게 하는 점이 인상적인 책.

* 개인적인 감상이며,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소설의 일부만 선택해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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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어 무궁화호 프로젝트에 지원한 아이들


2026년 온난화가 갑작스레 극심해지면서 전 세계에 일시에 재해가 찾아온 지구. 기후 위기의 여파로 대기근이 찾아왔다. 와중에 식량 자급률이 떨어지는 대한민국은 충격을 다이렉트로 맞았는데, 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굶주림으로 죽고, 가족끼리 서로를 잡아먹는 생지옥이 펼쳐진다. 이런 혼란의 상황을 정리한 건 재미교포 G였다.

다국적 식량 기업인 M사의 최초 동양인 임원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벌크선을 수백 대 구매해 식량을 가득 채운채로 부산항에 입국했다. '애국심 하나만으로 한 일'이라는 말로 단숨에 인기를 얻은 그는 그해 대통령이 되었고, 한국 내의 식량 자원을 독점하고 반동 집단을 무자비하게 참수하며 권력을 잡았다.

이후 유전자 조작을 통해 최소한의 영양 섭취로 최대 효율을 내는 '신인류 프로젝트'를 실시했고, 1부의 주인공인 '나'는 신인류 키즈로 태어난다.

순간적인 패닉의 시간이 지나가고, G의 지배 아래 다시 정상화 되어가는 한국에서는 지구 밖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우주의 끝을 감싸고 있는 의문의 '막'을 탐사하는 프로젝트 '무궁화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우주 방사능에 면역이 있는 신인류 아이들을 우주선에 태워 보낼 기획을 한다.

풍요로웠던 과거의 한국의 모습은 소설 안에 없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교통수단부터 사회 기반 시설이 파괴되고, 문화가 정체된 채로 생존만이 최우선 가치가 된, 어딘가 망가진 세상에서 '나'와 친구들은 하루하루를 견디어낸다. 배급에 의존하는 식생활에 새로운 시대의 아이들은 영양결핍으로 덩치도 작아지고, 늘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것이 기본값이 된다.

나는 지긋지긋한 가족과 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무궁화호 프로젝트'에 참가 지원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최악이다. 이 생지옥에 자기만 살기 위해 도망간다고 매도하거나, 너 때문에 배급이 준다는 부모의 말, 부모 부양의 책임을 다 맡기는 거냐며 악다구니를 지르는 형까지. 굶주림 앞에서 가족애나 사랑을 기대하긴 어렵다. 나는 '살고 싶어서' 기꺼이 우주행을 택한다.

함께 지원한 '하나'나 '형섭'도 저마다의 사정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각자도생'하기 위해 무궁화호에 스스로 발을 옮겼다. '살기 위해서'라는 말 앞에서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의 이야기속 인간들은 무력하다. 연대감이나 함께 미래를 도모하지 못한다. 매일 매일 임박한 생존의 문제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식량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G는 어쩌면 국민들의 시야를 좁히는 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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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죽여야만 하는 세상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던 '무궁화호 프로젝트'의 준비과정은 뜻밖의 문제에 봉착한다. 무궁화호 프로젝트가 여러 대외적인 이유로 축소되며 우주선에 탑승할 수 있는 인원수가 줄어든 것. 평가를 통해 우수한 성적을 낸 이들만 선별해서 우주로 보낸다는 결정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형섭은 자리를 만들기 위해 동기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내가 살기 위해 동기를 제거한 후 '나'는 죽은 아이의 하얀 다리를 떠올리며 죄책감에 빠지지만 마냥 감상에 빠질 수만은 없었다. 상부에선 무궁화호 프로젝트 자체를 취소하려는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토사구팽 당한 아이들에게 돌아갈 집은 애초에 없었다. 다들 '살고 싶어서' 편도 140년이라는 우주선 생활을 택한 것이 아닌가. 그들은 다시 무기를 들고, 무궁화호를 타고 본인들이 우주로 탈출하려는 군인들과 우주선 탈환전을 벌인다. 살육이 벌어진 건 당연하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런 세상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인가. 옆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 있는 소설 속 디스토피아에서는 개연상 그럴 수도 있다고, 그렇게 할 수밖엔 없었을 거라고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게 내가 바라는 세상인가 하면 글쎄다. 인지상정이 없는 세상에서 미래를 도모하기란 녹록치 않다고 생각한다.

신인류 아이들은 막을 향해 떠나는 우주선을 타고 떠날 수 있을까. 그곳에는 행복이 있었을까. 이 부분은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핍진한 와중에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건들 와중에 독자를 '어떡하지...' 하게 만드는 설정이 하나 있다. 바로 140년 간 날아가야 하는 우주선에 식량은 40년치 뿐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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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무엇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가.


2부는 무궁화호가 발사되고 수백여년이 흐른 시점에서 시작된다. 계속해서 막을 향해 날아가는 우주선 안에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았다. 이발사 '이육칠'은 죄수들의 머리를 깎고, 그들의 육신을 스팀기에 넣어 비료로 만드는 사형 집행관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료로 생산한 감자가 우주선 안 사람들에게 배급되는 유일한 식량이 된다.

어느 날 이육칠은 함께 일하던 이발사인 칠칠팔에게 의문의 쪽지를 받는다. 글씨를 읽지 못하는 그는 의문의 숫자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칠칠팔이 감찰실 사람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한채로 이발소로 끌려온다. "네가 직접 확인해."라는 말을 남기로 스팀기로 들어간 그를 보며, 이육칠은 칠칠팔과 열하나의 죄수의 머리를 자르러 갔을 때 했던 말을 생각한다.

"여기는 지옥이야. 내 애가 여기서 살기를 원하지 않아."


식량부족으로 아이가 부적격하다면 비료로 만들어버리고, 50살이 되면 마찬가지로 우주선을 위해 스팀기에 들어가야만 하는 세상을, 이육칠은 의심하거나 부정하지 않았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허나 칠칠팔의 쪽지를 따라가며 그는 우주선 세상의 계급과 질서와 그가 몰랐던 세계를 알아간다.

그들의 생존 목적은 따지고 보면 같았다. 바로, '막을 찾아 지구로 신호를 보내는 것.' 애석하게도 지구는 1세대 우주비행사들 시절에 반란과 혁명이 벌어지며 어쩌면 벌써부터 망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의 영역이 되었다. 그럼에도 우주선 사람들은 왜 살아가는가. 여전히 '막에 도달하는 것'은 그들에게 의미가 되는가.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희망이란 게 그런 거야. 인류의 전멸을 조금 앞당기더라도, 얻고 싶은 거겟지. 어쩌면 보험일지도 모르고."
"무슨 보험?"
"우리가 막 너머에 도착해서 신을 만나면, 전부 해결될지도 모르니까. 자기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거겠지."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中


오늘 굶지 않기 위해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은 있는가. 누군가의 안위를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시간이 길어져도 최초의 목적 때문에 움직이는 건 옳은가.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목표를 위해 도구처럼 쓰이는 게 맞는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가. 모험극의 형태를 취한 2부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특히 인간다움과 미래에 대한 대목에서 나는 무어라 답할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오늘의 생존을 위해 별 고민 없이 현재에 부역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인간은 인간이기에 의미가 되고, 희망을 준다.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의 인간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따뜻함을 찾아보긴 어려워도 스산하고 날카롭기에 더 마음에 꽂히던 SF소설이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참담해지는 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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