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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Jan 12. 2024

17. '그냥 하고 싶어서'라는 깨달음

좋아하는 것이 이젠 있어서요

17. '그냥 하고 싶어서'라는 깨달음


(구) <가디언즈 프로젝트> 원고를 새로운 이름으로 완성했다. 분량은 원고지 541매(A4 10pt 기준 76페이지)의 얇은 책 한 권 정도의 사이즈다. 이 이야기가 출판되기를 바라며 따로 작성한 출판기획서와 함께 원고를 출판사 투고 메일함에 보냈다. 한 달 정도의 검토 기간이 걸린다는 답신을 받았다.


마감을 하면 드라마틱한 감동이나 쾌감 혹은 기대감이 따라올 줄 알았는데 이번엔 묘하게 평온했다. 그저 그렇구나. 끝이구나. 이제 다시 시작이구나 싶었다. 그 뒤로는 별 생각이 안 나더라. 제발 이거 계약하게 해주세요. 이거 아니면 안 돼요. 하는 절박함도, 와 이거 매스터피스인데? 하면서 한껏 텐션이 올라서 신났다가 아냐. 역시 이딴 게 계약이 되겠어? 하고 좌절하는 조울 사이클도 오지 않았다. 끝났구나. 드디어 끝났구나. 이런 무미건조한 반응 뿐이라니 왠지 헛헛했다. 초고를 완성하던 순간도 돌이켜보면 잔잔하고 평온했다.


한 챕터를 남기고 안 써져서 미루고 미루다가 밤 10시에 도착한 무인카페에서의 마감 러시는 6시간 반만에 끝났다. 그 시간을 온전히 다 쓰는데만 할애하진 않았지만, 왠지 오늘은 끝날 거 같아. 오늘은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 같아. 하는 마음으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 원고 버전을 기준으로는 11개월, 모태가 되었던 초기설정 단편을 쓰던 때까지 고려하면 얼추 18개월 만에 도착한 (끝)이었다.


원고 파일을 세이브하고, 틈틈히 써두었던 기획안 파일을 열어보았다. 시놉시스 기승전결과 인물 소개, 원고엔 실리지 않은 사이드 스토리를 쓴 부분을 찬찬히 읽다보니 그간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퇴사를 하기 전에 살고 싶어서 찾아간 한겨레 문화센터의 소설 강의, 1년 간의 우울증-침대 생활, 걷기와 동해 마감 캠프, 공모전 투고와 뜻밖의 본심 진출, 출판사 미팅과 여차여차한 이유로 엎어진 계약, 다시 공모 도전, 예심 탈락 후 또 좌절, 다시 붙잡고 완결까지 개작. 여러모로 부침이 있던 원고였던 지라 안타깝기도 하고, 얼른 털어버리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복잡했다. 그런데 그런 복잡다단한 스토리 때문이라도 더 집착하고, 욕망하고, 매달릴 줄 알았는데 후련하게 내러놓을 수 있었다.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카페를 나왔다. 새벽 4시 40분이었다.


밖에 나와 조금 걸어가니 모 출판사 건물 한 층에 불이 들어와있었다. 저 사람은 4시 40분에 출근한 걸까. 아니면 집에 못 간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건물 사이를 지나 큰 길로 나왔다. 사진처럼 그 날은 안개가 엄청났다. 가시거리가 10m도 안 되는 답답한 길 위에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한 치 앞도 안 보인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생각하면서, 후련하네. 근데 이젠 뭐하지? 생각하면서, 또 그럭저럭 재밌었다고 생각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아파트 입구가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이걸 쓰려했을까. 이게 뭐라고. 이 책이 설령 계약된다고 해도 팔리면 얼마나 팔린다고. 1년 반을 갈아넣었을까?' 효율으로 치면 마이너스인 이 지난한 작업을 왜 해야만 했을까. 그동안은 답하지 못했지만 완결까지 가고 나서야 비로소 내 안의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만약 누가 시켰다면 나는 소설 쓰기를 하지 않았을 게다. 나의 속도로 A4 2.5페이지 초고를 쓰는데는 평균 3-4시간이 걸렸다. 산술적으로 쓰는 시간만 90~120시간이 그 사이 구상하고, 생각하고, 고쳐 쓰는 시간을 더하면 몇 배가 될 터다. 중간에 피드백과 노이즈가 끼어들며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다가 롤백하기를 반복하며 찢어버린 A4용지도 100장 남짓이니(어째 초고의 총량보다 많았다. 그만큼 헤맸다.) 되었으니 효율성이라곤 꽝인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내가 30여년 동안 방치하다가 아예 잃어버렸던 '좋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려고,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인풋 대비 산출물을 얻으려고 '목적'을 갖고 하는 일이 아닌, 말 그대로 '그냥' '하고싶어서' 한 일이기에 나는 할 수 있던 것 같다. 물론 그 사이에 삿된 꿈이나 목적성을 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얼른 계약을 따내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그 다음엔 연계해서 직업을 만들고 하는 꿈을 품었더랬다. 그러나 첫 단추를 꿰는 일부터 실패로 돌아가면서 기대도 희망도 사라진채 몇 개월을 다시 허송세월로 보내야 했다. (물론 그 사이에 다른 곳들과 연이 닿아 강연과 외주 작업을 하면서 보냈다.)


원망도 많이 했더랬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2-3년 바닥쳤으면 이제 올라갈만도 하잖아? 왜 또 이렇게 엎어버리는데!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용기가 없어 지르진 못했다) 근데 그 엘리베이터에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삶에는 목적을 '절실히 욕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터널 끝에서 나는 온갖 방법들에 천착했다. 대운 맞이하는 비방법부터, 끌어당김의 법칙, 자기 확언, 백 번 쓰고 말하기, 내면아이 명상, 현실 창조, 자아 탐구, 심리 검사, 타로와 별자리까지… 안 해본 것이 없다. 물론 그것들이 내 자존감을 높여주었고, 조금이라도 움직일 힘을 주었기에 감사한 방법들이었지만 나는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 바로 '그냥'이었다.


그냥이라는 말에는 아무런 대가나 조건이나 목적이 붙지 않는다. ~하기 위해서, ~하는 조건으로, ~를 받는 대신 같은 가정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다. 그렇게 어려워하던 '내 안의 내면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나에 대한 평가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나는 언제나 무조건 적으로 나의 편이 되기' 같은 마인드 교정도 결국 '나를 그냥 좋아하고 믿고 응원하기'로 이어진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냥' 한 마디면 충분하다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남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평가받을 필요도 없고, 효용을 측정할 필요도 없고, 돈으로 환산할 필요도 없이 '그냥' 하면 된다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무엇을 갈구하고, 인정받고 싶고, 욕망하고, 두려워했나. 그 일련의 내가 가졌던 마음들이 모두 해소되는 건 1층에서 N층으로 올라가는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다.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쓸 거냐고 묻는다면, 일단은 글쎄라고 할 거 같다. 당장은 막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쓰고 싶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후, 아니 5분 뒤라도 '그냥'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냥' 쓸 것이다.

언제까지 공모전 마감이니 그것을 위해서, 빨리 이야기를 써서 투고할 거리를 만들어서 출판사들에게 보내기 위해서, 얼른 데뷔하고 청탁을 받고 싶어서 같은 목적이 선행하면 될 것도 안 된다는 걸 이젠 안다. 다시 조급함이 올라와 나를 '현실적으로'라는 말로 끌고 가겠지만, 필연적으로 끌려갈 수밖엔 없겠지만 지금의 마음을 잊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좋아하는 게 마땅히 없어서요.'라는 제목은 어쩌면 폐기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글쓰는 걸 '그냥' 좋아한다는 것을 찾았으니 말이다. '좋아하는 게 이젠 있어서요.' 정도면 괜찮으려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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