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절창_구병모

#2020s한국문학

by 이요마
k662031678_2.jpg 절창_구병모(2025)


0. 더딘데 빨리 읽고 싶은 기묘함

구병모 작가의 소설은 기묘한 구석이 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의 활용이 적확하면서도 문장이 길다 보니 한 문장씩 읽으면 속도가 더디다. 하지만 워낙에 군더더기가 없고 이야기가 재밌다 보니 더딘데 빨리 넘어가고 싶은(?)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만다. 이 책도 그랬다. 독서를 함께하는 가정교사로 어느 부잣집(?)에 들어간 한 여성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리고 이 시점이 이 책의 묘를 더해주는 포인트다. 언뜻 TMI가 너무 많아 보이기도 하고, 출판사에 한 분씩 계시는 20년 차 이상 인사부장님 같은 방어적인(?) 언어 표현은 이 화자에 대해 호감보다는 묘한 거리감을 만든다. 마치 동료로는 함께하고 싶지만, 친구하고 싶지는 않은 정도의 젠틀함이라고 할까. 그럼 감정의 거리를 확보한 상태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래서 초반의 사건보다 설명이 더 많은 더딘 구간을 스킵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나, 넘어가선 안 된다. 구병모 작가는 다시 말하지만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허투루 쓰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1. 절창, 상처

제목에 쓰인 절창은 칼이나 유리 조각 따위의 예리한 날에 베인 상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상처를 만지면 그 사람의 정보가 흘러들어온다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처음은 친구 안 하고 싶은(?) 중년 여성 화자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오언의 저택에 도착한 그는 의도치 않게 아가씨가 고문한 남자의 상처에 손을 대고 정보를 얻는 장면을 목격한다. 함구를 조건으로 일을 하게 된 그녀는 마치 라푼젤의 성처럼 고립되어 있는 아가씨를 염려하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간다.

이 리뷰에서는 줄거리나 내용 전개보다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상처가 등장한다. 타인에 의해 생긴 상처와 자의로 만든 상처다. 전자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치거나(초등생), 아가씨를 통해 정보를 빼내기 위해 고문하며 만드는 ‘의도’를 이루기 위한 상해이고, 후자는 자신의 ‘의중’을 이해받고 싶은 오언의 자해이다.

아가씨의 능력은 불완전하다. 그녀의 선택에 따라 정보는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때로는 거짓으로 발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적이 투명하고 의도가 선명한 이 작업은 진실을 알기 위해 거행되지만 믿음으로 움직이는 비즈니스(?)다. 그녀의 역할은 정보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일 텐데, 컨디션 이슈로 혹은 반항을 하기 위해서 정보가 틀리는 경우엔 존재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회사와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오언은 그녀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어 보인다. 자세하게 나오진 않지만 가문의 본류(본사)와 떨어져 요식업을 하는 그의 처지에는 이해받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반복해서 자해를 하며 자신의 마음속을 읽어보라고 하는 행동에는 오언의 어두운 상처가 있을 게다. 설사 그녀가 오독하더라도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어떤 상처 말이다.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2. 오독에 대하여

아가씨는 부모 없이 보육원에서 자랐다. (있다고 한들 도움 되지 않은 존재였다.) 동정받고, 차별받으며 누구 하나에게도 의탁하지 못하고 자라왔다. 그런 그에게 호의 아닌 호의를 제공하는 건 역설적으로 오언이다. 노골적으로 그녀의 능력만 빼먹는다거나, 성적인 욕망을 부렸다면 명명백백한 악인으로 단정 짓고 맘 편히(?) 읽을 수 있으련만, 그는 철저히 선을 지키고 호의를 베풀면서도 아가씨를 구속하고 제약하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한 인물처럼 느끼게 만든다.

독서 교사인 ‘나’는 그에 비해 상식적이다. 자해한 오언을 응급실로 가도록 하고, 아가씨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모습에서 내면에서는 판단을 하지만, 오독 없이 상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한다. 의뭉스러운 구석이 가득하면서도 목적에만 충실한 인물들(한, 박, 강) 사이에서도 사람다운(?) 판단을 한다. 깐깐하고 냉정할 것 같은 첫인상과 다르게 말이다. 사실 이런 첫인상도 오독되기 쉽다. 우리는 상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이해보다는 단정을 하고 만다.

그러나 ‘나’라는 화자를 통해 우리는 생각보다 객관적으로 아가씨에 대해, 오언에 대해 바라볼 수 있다. 그가 제3자이기도 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를 통해서도 말이다. 어쩌면 오언이 오해를 사면서까지 아가씨를 자기 품에 데리고 있는 이유는 평생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이해받고 싶은 나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해석받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독서라는 메타포도 오독이라는 키워드에 힘을 실어준다.


3. 독서와 관계

책은 쓴 사람의 의도로 탄생하지만, 독서의 영역에 진입하는 순간 독자에게 주도권이 넘어간다. 창작자가 구구절절 설명해서 진짜 해석이 무엇이다 공언은 할 수 있어도, 창작물의 감상은 온전히 보는 사람의 자의적인 판단에 달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독서의 과정은 오독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구병모 작가는 오독의 여지를 최소한으로 만드는 경이로운 작가이지만, 그럼에도 행위의 특성상 벌어지는 게 오독이다. 있는 그대로의 이해, 있는 그대로의 수용은 사실 불가능하다. 한 사람의 말이 발화되는 시점에서 팩트는 패러프레이징을 거쳐 재구성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적확하게 작가가 떠오른 영감과 에너지를 담아 이야기를 쓰더라도 글로 옮겨 담는 과정에서 원본이 유실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말하는 이(쓰는 이)도 이러한데, 그 말을 받아들이는 수용자는 어떠하겠나. 당연히 오해와 오독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독서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나’와 아가씨의 관계는 그런 오독을 주고받으며 이해로 나아가는 관계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오해를 조정해갈 만한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오언과 그녀의 관계는 조정이 불가한 먼 관계다. 자신의 상처, 즉 텍스트를 주면서 해석하기를 바라는 일방적인 주입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끊임없이 그런 관계를 거절하고, 텍스트 수용 자체를 거부한다. 관계를 통해 거리감을 좁히고 오독을 좁혀가려는 시도 없이는 마치 혼자 하는 독서처럼 오독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4. 그럼 나는 제대로 읽었는가

오독이니 이해니 하는 말을 늘어놓으며 리뷰를 쓰고 있지만, 나 또한 오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사 오독이라도 읽은 내용을 곱씹어보면서 이해하려는 태도만은 지키고 싶다. 읽는 재미를 잃었던 요 몇 년을 되돌아보면 나는 권수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스토리 라인을 확인하고, 인물의 감정선을 파악하고, 그래서 어떤 플롯을 거쳐 어떻게 끝났는지를 파악하며 인풋 하는 데 과하게 집중을 했다. 그래서 읽고 해석하고, 작가가 깔아 둔 여러 층위의 의미들 속에서 헤매고 해석하는 과정을 스킵하다 보니 점차 쉬운 책만 찾게 되고, 재미는 없어져 갔던 악순환이 벌어졌던 것 같다. 차라리 오독을 하면서라도 나의 생각으로 책과 대화를 했다면 좀 더 즐겁게 읽지는 않았을까. 어디 나가서도 편안하게 독서를 취미라고 말할 수 있진 않았을까 싶었다.

이 책은 다만 상처를 읽을 줄 아는 여자의 판타지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 숨은 저의를 찾아보면서 읽는 맛이 있는, 다층 레이어의 이야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도 오독이겠으나 독서가 주는 읽는 재미가 아닐까 생각하며 리뷰를 마친다. 이참에 단어의 숲에 한 번 빠져보길 권한다.


"신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
"신이라는 건 있잖아, 그냥 하나의 오래된 질문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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