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_이영도

#2020s한국문학

by 이요마
k392032448_1.jpg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_이영도(2025)


0. 피할 수 없는 진입장벽

이영도 작가의 소설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없을 텐데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안 본 사람 쪽이다. 오디오북이 한참 등장하던 시기 (당시엔 얼마 없던) 등장인물 풀더빙의 <오버 더 호라이즌>을 듣긴 했지만, 읽은 것과는 감각의 감도가 다르지 않은가. 여튼 내 첫 이영도 소설은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이 되었고,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바로 진입 장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바로 인명이었다. 카쉬냅 백작 더스번 칼파랑을 이르는 인명만 해도 카쉬냅 백작, 백작, 더스번 경, 더스번 칼파랑, 무적경, 유산관리인 등등 한 둘이 아닌데 문제는 주요 인물만 9명 정도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이(?) 노트에 인명을 하나씩 써가면서 고유명사들을 채워갔다. 책을 읽다가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나와 같은 초심자들을 위해 길을 잃지 말라고 인명도를 적어둔 리플릿이 있더라.

여하튼 명사의 압박을 헤치고 나와서 마주한 스토리는 생각보다 간단한 편이다. 오소리 옷장이라는 눌트 백작의 별장에서 스타 작가(?) 휴름 자작 어스탐 로우가 칼에 찔려 사망한다. 칼에 찔린 그는 죽기 전에 피로 다잉메시지를 쓰다가 안 되겠는지 아예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임사전언, 그러니까 다잉메시지를 쓰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 분량이 9권짜리 대하소설 분량으로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스탐 경은 죽은 걸까 살은 걸까. 그를 찌른 진범은 누구일까. 이영도 작가는 독자들에게 추리 게임을 던진다.


1. 범인들의 알리바이

사실 추리 소설이지만 전개는 느슨한 편이다. 왜냐면 시체(?)가 4년 째 다잉메시지를 쓰고 있기 때문. 필사본으로 옮겨진 내용을 통해서 어스탐 경은 4명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이 곳에 자신을 초대한 눌드 경과 그의 부인 에이바, 친동생 세티카와 고모 올코아 부인까지. 네 사람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와 원한을 갖고 있다. 그래서 충분히 그를 죽일 수도 있는 동기가 있지만, 알리바이들은 또 다들 갖고 있다. 진범은 누구인가.

도서 구매자를 위한 특전(?)인 유튜버 불법스님의 해설 영상에서 스님은 이런 뉘앙스로 말한다. "사실 추리 자체보다는 이영도의 소설이기 때문에 재밌는거다." 이게 뭔말인가... 싶지만 딱 맞는 말이다. 매 페이지 던지는 떡밥들을 하나씩 하나씩 회수하다가 종국엔 빠짐없이 정리해준다.

이영도 작가의 맛이 무언지 잘 모르는 나도 감탄할만한(?) 회수력을 보면서, 사실 누가 진범인지 찾는 가보다 작가는 어쩔려고 이렇게 뿌려놓는 거지... 하는 우려가 앞서긴 했다. 근데 그걸 해낸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절반 이상이 넘어서까지 새로운 정보들이 등장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더스번 칼파랑 경과 사란티네의 서사에 대한 정보가 없이 들어갈 때 말이다. 이건 이영도 작가의 팬들에겐 진입 장벽이 안 되었을 터.)


2. 이미지의 충격

추리를 따라가는 것도 묘지만, 안 본 눈(?) 대표로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미지의 충격이었다. 특히 어스탐 경의 육필 원고를 확보하기 위해 찾아온 유와르 사서와 어둑이 사서의 모습이 그랬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이즈와 외관, 익사체를 들고 소통하는 괴수, 환각을 만드는 이상 능력자들 앞에서 오소리 옷장이 속수무책 흔들리는 장면이라든지, 스포 때문에 길게 말은 못하지만 결전의 순간이라든지 압도감을 주는 묘사들이 인상적이었다.

불법스님에 따르면 고딕 호러가 아니라 코즈믹 호러에 가깝다는 말마따나, 러브크래프트가 연상되는 경이로운 존재들과, 스타크래프트를 연상시키는 결전이 이런 배경에서 이정도의 스케일이 나올 수 있나? 싶은 생경한 경험을 느끼게 만들어주더라.


"찬탈자! 이탈자! 수탈자! 박탈자! 겁탈자!"
"파멸의 대가리를 휘감아 유열의 관이 되는 끈적거리는 독사! 어스름 속에서 잿빛 피부에 매달리는 불길한 거머리! 숭고함을 타락시키고 신성함을 고사시키는 악취를 풍기는 염소!"
"카쉬냅 백작 더스번 칼파랑!"
"야!"



3. 더스번 칼파랑과 사란디테

내가 좀 더 알았으면 재밌을 것 같았던 부분은 주요 인물로 나오는 더스번 경과 사란디테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이전 작품을 읽고 이 작품에 진입했더라면 훨씬 더 재밌게 읽진 않았을까 싶었다. 둘이 친한 건 알겠는데, 중간중간 그들의 행적을 알려주는 대사들로 어떤 건진 알겠는데, 새로운 정보들의 홍수 속에서 그것까지 캐치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영도 작가의 작품은 여러 번 읽으라는 말이 있는 것일까.. 여하튼 시간을 내서 전작들을 읽어볼 생각이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준 책이었다.


4. 작가의 메타픽션

한편 이책은 작가가 작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메타픽션이라고도 부르던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쓰는 행위에 대하여, 작가와 독자에 관하여, 그리고 작품과 작가의 관계에 관하여 끊임없이 은유하고,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의 생각을 말한다. 작가의 변 같기도 하고, 보내준 사랑에 대한 감사 같기도 한 그 부분들도 참 인상적이었다.


도서관은 천년만년 이어질 작가 최후의 목적지가 아니라 미래의 독자와 작가가 함께 이용하는 심부름꾼일 뿐이에요. 작가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독자니까.


"누군가가 어떤 작가를 옹호한다고 말할 때 그자는 십중팔구 어떤 글을 옹호하는 겁니다. 작가의 방을 나와 세상을 누비며 자기 편을 만들거나 자기 적을 만들어내는 건 글입니다. 작가는 방에 남겠다고, 고독하겠다고 결정한 사람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024]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_서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