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잡지] 릿터 3호

문학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넘어서자.

by 이요마
릿터.jpg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3호(2016.12. / 2017.1.)

사진출처 : 다음 책


*책을 빌려주신 @soripza 님께 감사합니다.


1. 들어가며

요즘 문학잡지들이 핫하다. 은행나무의 '악스트', 창비의 '문학3', 민음사의 '릿터', 엘릭시르의 '미스테리아'등 출판사마다 감각을 살려 특색 있는 잡지들을 찍어내고 있다. 나에게 기존의 문학지의 이미지는 무식하게 두꺼워(국어사전 두께만 한) 책을 들기도 전에 압박을 주고 이름을 잘 들어보지 못한 작가들과(간간히 아는 이름이 있는) 알기가 더 어려운 평론가들의 이름으로 가득한, 언젠가는 읽어보고 싶지만 엄두가 안나는 그런 상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는 20년이 다 되어가고, 한국 문학 노잼이다. 그들만의 리그다. 현학적이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선입견도 그득하던 와중에 신경숙의 표절이 터지고, 문단 내 성폭력이 사건들이 연달아 제보됨에 따라 소위 문단의 위상은 점점 추락하고 있었다. 작가들의 단행본도 잘 안 나가는 마당에 두꺼운 문예지를 보는 사람은 점점 찾기가 어려워졌을 게다.

민음사는 2015년, 40년간 발간해오던 '세계의 문학'을 종간하고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를 발간한다. 기존 문예지의 방식에서 벗어나 내부 편집자(민음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잡지를 만들었다. 1호에 '인터뷰-읽는 당신' 코너의 인터뷰이가 바로 샤이니의 블링블링 is 종현이라는 것은 화제가 되었다.


2. 문단에 대한 막연한 동경 - 표절과 성폭력

한국 문학에 미쳐서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다독가도 아니고, 직업 문인이 되기 위해 수백 개의 공모전에 습작 수십 편을 보내는 열정 있는 습작생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막연히 '문단'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좋았다. 이쪽 길로 발을 들이면 벌이도 다른 직업을 택했을 때보다 반에 반도 못 받을 것이고, 출판계는 사양산업이며(문학은 출판되면서 힘을 얻게 되니까.), 무엇보다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드럽고 치사하단다.라는 선배, 선생님들의 말을 들어도 더욱 아련해졌다. 별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기에 더 빛나 보이듯이 '문단'이라는 두 글자는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어쩌면 '문단'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숭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종교처럼 '문단'의 사람들의 표현은 좋은 것. 멋진 것. 따라 하고 싶은 것으로 치부했었다. 나는 정말로 그 가상의 영역에 끼고 싶었다.

그러나 몇 년 사이 많은 것이 바뀌었다. '문단권력'이라는 것이 신경숙 사건을 통해 가시화되었고,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을 통해 '문단' 안에서 자행되는 더러운 민낯이 세상에 공개되었다.(물론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은 진행형이다.) 내가 사랑하던 '문단'의 권위는 박살이 났다. 내가 동경하던 '작가'라는 직업에도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왜 환상을 품어왔을까 하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3. 릿-터와 박살

고맙게도 릿터는 그런 배신감 속에서 나를 꺼내 주었다. 그리고 뭉글뭉글 내가 만들어온 망상을 조금씩 걷어냈다. 조악한 비유였지만 다시 '별'을 가져와 보면, '닿을 수 없다.'와 '빛이 난다.' 두 부분으로 나눠서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닿을 수 없다는 것은 나와 대상의 거리가 까마득하게 멀다는 의미다. '문단'은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선별된 소수의 인원만 소속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착각을 만든다. 그곳에서 인정을 받은 문인들은 나와는 다른 부류의 존재일 것이라는. 허나 문인이라는 직업도 결국 사람의 일이다. 아무리 거창하게 포장을 해도 문학은 사람이 쓰고 사람이 읽는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특별한 존재들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다. 아니, 외면하고 싶었다. 내가 능력을 인정받아 그 무리에 들어간다면 나 역시 특별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릿터에는 짧은 소설(엽편소설), 이슈에 관한 이야기(주로 해당 호의 주제에 맞게), 산문, 인터뷰, 단편소설, 시, 리뷰 등 다양한 글이 실린다. 기존 문예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던 '평론과 담론'은 빠지거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낮췄다. 문학은 원래 이런 거야 흥칫뿡 하면서 읽을 사람만 읽어. 하는 듯한 관성에서 벗어나서 '얘들아 이런 얘기가 있는데 한 번 들어 볼래?' 하는 듯한 태도의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팔짱을 낀 채로 있어 보이는 자리에 있고 싶던 것인가?' 부끄럽게도 그랬던 것 같다.

두 번째는 '빛이 난다.'는 속성이다. 있어 보이는 자리.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인생을 살던 '나'라도 누군가 '넌 사실 백조였어!'라고 말해줄 것만 같은, 고고하게 목을 쭉 빼고 헤엄을 칠 것만 같은 그런 삶을 상상했다. 고등학교 동창 놈 하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너는 말이야.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 그 위에 있는 것만 생각하는 것 같아.' 아마 내가 상처를 받지 않게 최대한 좋게 말을 해준 것이겠지만, 실은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그런 것을 생각해도 늦지 않다는 조언이 아니었을까. 내가 바라던 문단 안의 문인으로의 삶은 사실 빛이 나는 자리는 아니다. 습작생과 문청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되기만 한다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인정하긴 싫지만) 개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릿터의 '쓰는 존재'라는 인터뷰나 장강명 씨의 '문학상이 타고 싶다고?' 에세이를 보고 있노라면 구체적인 계획이 없거나 현실감각이 부족한 사람은 '쓰는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여실히 깨닫게 된다.(더불어 이쪽 직업 벌이가 녹록지 않다는 것도) 우상처럼 '멋진 존재'이기만 하던 이들도 결국 먹고사는 것이 우선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내가 사는 이곳은 현실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만든다.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4. 이동진 씨의 한 마디로 마무리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라는 팟캐스트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던' 이동진 씨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온전히 그의 말을 기억할 수는 없어서 내용만 대략 요약하면)

"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복 가능성이에요. 지금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30년 40년 50년 반복할 수 있는가. 나의 재능이 한 번 쓰고 털어버릴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재능을 써먹을 수 있는가. 보수를 덜 받더라도 이 일을 했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판단을 하셔야 해요. 그리고 그 판단은 본인만 할 수 있고요."


다른 사람들은 릿터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준 잡지였다.


(이제 와서 얘기하는 것은 웃기지만 3호의 주제는 랜선-자아 다. PC통신부터 오늘날의 '온라인' 사회까지 여러 방면으로 이야기를 한다. 부담 없이 그러나 마냥 가볍지는 않게 읽을 수 있는 잡지였다. 뭐라고 쓴지 잘 모르겠다. 히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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