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나경 인터뷰 #21
앞선 인터뷰들도 대부분 그러했지만, 추은선과의 인터뷰는 특히 더 자유분방했다. 인터뷰와 무관한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고, 학나경의 요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또 많은 시간을 쏟기도 했다. 지금 추은선은, 어느 때보다도 고민이 많다.
로운. 학나경 인터뷰에 응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궁금하다.
은선. 처음에는 이야기할 게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로운의 글을 보니까 그들의 고민과 삶에 대해서 묻는 인터뷰더라. 난 삶이 정제되지 않지만. 해외에 사는 분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들도 토로하고싶은 게 있어서 했나보다’ 했다. 나도 지금의 내 고민들 정도는 얘기해줄 수 있겠다 싶어서 하게 됐다.
로운. 요새 무슨 생각을 하고 지내고 있는지.
은선. 일, 삶, 방향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무얼 위해 일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그런데 급하게 정의 내리고 싶진 않아서 이런저런 시도와 경험들을 일부러 해보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로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은선. 지금까지는 직업으로서의 방향만 생각했다. 그러다 궁극적인 내 인생의 최종 목표는 뭘까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졌는데,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 제일 뿌듯하고, 내가 도움이 될 때 최고로 기쁘더라. 나중에 직업이 뭐로 바뀔진 몰라도 나는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누군가 SOS를 외치면 당장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로운. 본인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싶다는 뜻인지.
은선.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는 아직 내가 섣불리 구체적으로 정리해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뭔가 앞으로도 많은 걸 쌓아가야 되는데 일적인 도움만이 선한 영향력일까 싶다. 내가 블로그에서 계속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도, 직접적인 관계 없는 사람들한테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인 것 같다. 일적인 부분을 떠나서 일상에서 쓸데없이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좋아한다. 일적으로도 당연히 내가 누군가를 잘 이끌어주는 리더가 되고 싶은 건 맞는데, 그냥 삶 자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명예, 돈 이런 것들에 대한 집착은 없다.
로운. 누가 물어보지 않더라도 먼저 사람들과 깊이 있게 이야기해보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은선. 일을 하는 이유, 인생의 최종 목표, 살아가는 이유들을 주변에 묻고 있다. 뭐 하러 깊게 고민하나 하겠지만 나에게는 이유 없이 살아가는 삶이 제일 고통스럽다.
로운. 조금 미묘한 부분을 구분해서 말하자면, 지금 일을 하는 이유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넘어졌을 때, 다시 궤도에 올라탈 수 있을만큼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고,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라면 '살아있는 동안 내가 누군가에게 쓰임새가 있음을 느끼기 위해'다. 내 행동의 동기는 ‘누군가를 돕는/기쁘게 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 이다. 해로운식탁을 하는 이유도, 할로윈 호박 바구니를 빌라 계단에 걸어놓고 사비로 사탕을 채운 이유도, 누군가가 나로 인해 기뻐할 때 나 역시 기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다. 나는 즐겁지 않은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 내가 속한 모든 곳에는 즐거움이 있다.
은선. 나는 항상 퇴직의 나이가 짧다고 생각한다. 퇴직하고도 남은 인생이 길텐데 그동안은 무얼 하며 살게 될지가 궁금하다.
로운. 이 질문을 내가 주변에 똑같이 하고 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곳도 마찬가지고, 이전에 뵈었던 리더들이 나이가 많아봤자 40대였다. 그들 역시 한때 주니어였을 거고 그들 주변에도 주니어 마케터들이 지금처럼 많았을 것 아닌가. 근데 그 나이대에 마케터 실무자로 남아 있는 분들이 진짜 없지 않은걸 보면 일반적인 직업 수명은 40대 중반이다.
물론 그 나이까지 남아서 우리 팀장님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비율상 극히 적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마흔 중반부터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아빠는 올해가 정년은퇴이신데, 나는 적어도 15년은 더 먼저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해야한다. 그런 걱정 때문에 여기저기 질문을 하고 있다.
은선. 근데 그래도 멋있는 건, 일단 그런 걱정을 안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파고들면서 일단은 해보자는 태도다. 나는 그렇지 못하다. 무언갈 새로 시작하게 되면 내가 미리 설정해둔 높은 기준에 부합할 때까지 항상 되돌아본다. 이미 문제가 없는 부분이어도 문제가 정말 없는 것인지 확인한다던가, 준비물을 다 챙겼어도 정말 다 챙겼는지 돌아본다던가. 무언갈 하기 전에 부족한 부분을 끊임없이 채우려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과정 없이 가볍게 해내는 사람들이 대단하다.
추은선이 안고있는 고민들은, 방향이 명확하다. 본인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되돌아본다. 스스로에게서만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의 고민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 지금 추은선은 삶을 스케치하고 있다.
로운. 본인이 되고 싶은 모습의 이상향이 있다면?
은선. 누군가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제 인생의 최종 목표는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인데 회사에서도, 가족에게도, 지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가보다. 든든한 사람이 되고 싶다.
로운. 본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 존재가 있다면.
은선. 진짜 많다. 가벼운 걸로도 배우고 싶은 게 많다. 얼마 전에 코엑스에 갈 일이 있었다. 삼성역에서 코엑스로 가는 길이 엄청 복잡하게 생겼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야하는 곳에서 나보다 한참 앞에 계신 분이 문을 잡아주셨다. 문을 닫고 가도 상관 없는 거리였는데도 잡아주고 있어서, 그 뒤로부터 나도 문을 잡아주기 시작했다. 그 때 그 상황이 너무 따뜻했다. 그런 느낌을 나도 다른 사람에게 주고싶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도 선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로운. 추은선은 어떤 사람이다 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지.
은선. 생각이 깊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상대방에게 최대한 피해를 안 주고 싶어서 역지사지가 잘 된 것 같긴 한데 개인적으로 생각이 깊어서 고통스럽다.
로운. 생각이 깊을 때 고통스럽다고 표현한 이유가 있다면? 깊게 생각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느끼는 지점이 궁금하다. 일상 생활의 방해를 받아서 그런 것인지, 생각의 방향이 부정적이어서인지 궁금하다.
은선. 약간 가볍게 털어낼 수도 있을만한 생각들까지 ‘굳이 여기까지 생각한다고?’ 싶을만큼 붙잡고 또 한 번 생각하곤 한다. 남들은 이걸 그냥 쳐낼 텐데 나는 왜 이렇게 붙잡고 있나 싶다. 계속 반성할 게 생기고 고쳐야 될 게 생기니까, 고쳐야 할 이유들도 생각하고 상대방에 영향을 미쳤을만한 단서들이 계속 떠오른다.
예전엔 저자세로 나오지 말라는 소리까지 들었었다. 난 저자세가 아니라 배려를 해준건데 상대방한테는 저자세로 나온다라는 느낌으로 들었던 것이다. 그때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먹어서 약간 저자세일 필요는 없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면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저자세가 나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런 식으로 계속 꼬리를 계속 문다. 더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제 생각 안 해’ 라고 생각을 한다. 뭔가 문제가 계속 발견되고 생각을 못 해본 지점들이 계속 발견되고 그런 걸 개선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다.
로운. 다른 사람이 나를 이렇게 봐서 의외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는지.
은선. 내가 말이 느린 사람이라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얼마 전 친구 회사 동료와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언니에게 들은 말이다. 언니는 나에게 “나랑 비슷하게 나긋나긋 느리게 말하는구나’라고 공통점을 말해준 건데 혼자 속으로 놀랐다. 왜냐하면 항상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쏘아붙이느라 말이 빠르고 과격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 몰랐던 부분을 이야기해 주어서 나에 대해 하나 더 알아가게 됐다. 그 말을 언니가 해줬는데 친구는 당연하게 웃으면서 날 쳐다보더라. 그래서 앗? 나 그런 사람? 이었어? 했습니다. 그래서 신기했다.
로운.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런 모습을 더 바라봐줬으면 하는 면이 있다면.
은선. 언니, 오빠들이 항상 또래 중에 제가 제일 어린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이 조금 나를 꿍하게 만든다. 보이는 모습이 해맑은 질문쟁이 같은 느낌이라서 그런 것 같다. 생각도 많고 궁금한 게 많긴 하지만 마냥 해맑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질문 뒤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라고 비칠 만한 큰 덩어리 같은 생각들이 숨어 있는데 거기까지 말하면 지칠까봐 입을 다무는 것뿐이다. 나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처럼 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어리게 본다 한들 그런 시선보다 내가 더 중요해서 계속 앞으로 많은 어른들에게 물어볼 것이다.
로운. 얼마 전에 인터뷰한 누군가는, 자신이 질문하는 이유가 한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빨리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추은선이 질문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은선. 난 내가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에 대한 답을 다른 사람한테서 스케치를 한다. 그래서 지금 내 고민들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한다. 내 확신이 맞는지, 내 확신에 용기를 얻어도 되겠다하면서 날 좀 채우는 편이다. 난 내 안에 아직 빈틈이 너무 많아서 남들의 생각으로 틈을 채워 넣는다.
로운. 그러면 보통 스스로의 고민들을 남들에게 질문하는 것인가보다. 너의 고민들에 대한 다양한 답들 아카이빙 하는 것 같다.
은선.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은 오히려 반대되는 사람한테서 오는 답변들을 더 잘 메모한다. 그것들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 확신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다보면 내 주관이랑 내 편협한 시각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사람들한테 질문하면서 ‘이게 문제가 될 수도 있구나’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려고한다. 난 그래서 궁금한 걸 채워가는 게 제일 재밌다.
로운. 사회가 중시하는 학나경이라는 요소에 대한 본인의 의견은 어떤가.
은선. 이해한다. 학나경이 말해주는 지표 무시 못한다. 특히 좋은 학교에 모여있는 친구들이 그렇지 않은 친구들에 비해 목표를 향한 실행력을 가지고 있다.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학나경을 부정 못한다. 나도 딱히 좋은 학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본인의 목표와 계획에 확신이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학나경의 기준을 뚫기도 한다. 핵심은 어떤 자세로 통과하느냐 같다. 이미 갖고 있는 우리의 것을 단단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보자! (내가 예술 쪽이라 긍정인 것도 사실이다.)
로운. 공식 질문이다. 학나경을 빼고 자기 소개를 한다면.
은선. 세상이 궁금한 추은선. 평소에 굉장히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다양한 것에 꼬리 질문이 많다. 사실 남들도 다 사소한 부분까지 궁금한 게 많을 줄 알았는데 나만 다각도로 궁금해 하는 것 같다. 왜 이렇게 했을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다 궁금하다. 그러다 고전도 읽게 되는데 모르겠으면 찾아내야 하는 피곤한 삶을 산다. 하지만 무언가 새롭게 배우거나 알아가는 게 여전히 재밌고 좋다. 결국은 이 행위들이 세상을 향한 질문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더 큰 그림을 보려는 것, 규칙적인 일상을 지키는 것, 질문으로 고민을 채우는 것. 추은선은 삶을 본인이 주도하려는 의지가 뚜렷하다. 답을 찾아가는 길에서 고민들을 맞닥뜨릴 때, 질문을 던지면서 방향을 잃지 않는다. 어느 시기보다 가장 궁금한 것이 많을 추은선의 스케치가 학나경을 통해 조금 짙어졌길 바란다.
작성자 손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