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와 회색 신사의 시간.

너의 시간도 회색신사의 시간만이 아니길.

by hako

모모의 시간과 회색신사의 시간.

같은 시간인데, 얼굴은 두 개다.


모모의 시간은 따뜻하고 반짝인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시간, 이유 없이 웃게 되는 시간,

밥을 먹는 행위가 “살아 있다”는 감각으로 돌아오는 시간.

시간은 흐르지만, 흘려보내지지 않고 그 안에는 온도와 표정이 남는다.


회색신사의 시간은 차갑고 텅 비어 있다.

할 일을 체크하고, 메일함을 정리하고, 일정표를 채우고, 효율이라는 걸 올리는 시간.

분명 나는 움직이고 있는데, 지나고 나면 무엇도 남지 않는 시간.

무언가는 남는 거 같은데 ‘나’는 비어 있는 느낌.

회색신사들은 바로 그 틈을 노린다. 감정이 없을수록, 망설임이 적을수록,

삶은 더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매일 나는 두 개의 시간을 오간다.

오전은 회색신사의 시간에 걸맞게 움직인다. 속도를 올리고, 쪼개고, 계산한다.

오후에는 잠깐 모모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햇빛이 나무사이로 들어오는 순간, 흥얼거리는 노래 한 소절, 우연히 마주친 따뜻한 문장 하나.

그러다 저녁이 되면 회색신사의 시간이 내 하루를 정리한다. “오늘은 뭘 했지?”라는 질문에 답은 많지만,

감각은 희미하다.


그래도 요즘은 생각한다.

회색신사의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회색신사의 시간은 ‘나쁨’이라기보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발명한 모드에 가깝다.

버티기 위해,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감정을 잠시 꺼두는 시간.

마음이 너무 일렁이는 날에는 오히려 회색신사의 시간이 나를 살린다.

감정을 다 끌어안고 있으면 무너질 것 같을 때, 차갑고 텅 빈 시간은 일종의 보호막이 된다.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 상태”는 때로 “더 이상 다치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회색신사의 시간이 길어질 때.

회색이 ‘잠깐’이 아니라 ‘기본값’이 되는 순간, 삶의 언어가 바뀐다.

‘살아낸다’가 아니라 ‘처리한다’가 된다

그때부터 시간은 저장되지 않는다. 오늘이 내일과 구분되지 않고, 얼굴들이 사라진다.

회색신사들은 그걸 ‘효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효율은, 내가 나를 잃는 속도일 수도 있다.


하루를 전부 모모의 시간으로 살 수 없다면,

최소한 모모의 시간을 다시 내 쪽으로 끌어오는 장치는 가지고 살자고.

회색신사의 시간이 길어진 날에는 그 시간을 애써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망함’이라고 결론 내리는 대신,

‘오늘은 방어 모드로 하루를 통과했다’고 이름을 붙이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회색은 실패가 아니라, 나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방식일 수 있으니까.

모모의 시간은 거창하게 만들지 않기로 했다.

완벽한 휴식이나 큰 행복을 기다리다 보면, 반짝임은 늘 다음으로 미뤄진다.

대신 아주 작은 단위로라도 확보하려고 한다.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시는 몇 분, 목적 없이 걷는 짧은 산책,

마음에 남는 한 페이지, 누군가와 주고받는 짧지만 진짜 같은 대화.

그 조각들이 모이면 하루는 다시 얼굴을 갖는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시간에 표정을 남기고 싶어서였다.

오늘을 조금이라도 미소 짓게 하는 하나만이라도 붙잡아 기록해 두는 것.

한 문장이어도 충분하다.

그렇게 적어둔 흔적은 시간이 텅 빈 채로 증발하는 걸 막아준다.

시간이 얼굴을 갖는 순간은, 어쩌면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두 개의 시간을 오가며 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금씩 배운다.

회색신사의 시간은 필요하다. 다만 그 시간이 내 전부가 되지 않게.

모모의 시간이 사라지지 않게.

우리의 삶은 결국 ‘무슨 일을 했는가’만으로 기억되지 않으니까.


같은 시간이지만, 두 개의 얼굴.

나는 오늘도 그 경계선을 건넌다.

아직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이 시간에.

하루가 끝날 때, 내 시간이 회색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넌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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