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권은 없지만 이력서는 쓸 테야

미국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며 사는 일상 이야기

by 미쓰조앤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중략)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 오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중략)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태평양 바다를 건너 미국에 오니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습니다. 가족, 친구, 친지 없는 헛헛한 땅으로 남편과 함께 달랑 가벼운 이불 한 채와 묵직한 한국 요리 책 한 권을 가방에 넣어왔습니다. 고층 빌딩들이 서울처럼 많은 줄 알았으나 남편은 엘리베이터 없는 빌딩에서 일했고 우리 가족은 계단 없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높은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방의 언어와 문화에 저는 납작하게 눌렸습니다. 세 아이들이 태어났고 아이들은 쑥쑥 자랐습니다. 일하는 곳에서 만나는 같은 처지의 이방인들과 섞여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습니다.


세상 하늘의 경계는 사라졌구나 했는데 외려 예기치 않았던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때입니다. 아들 셋을 아웅다웅 키우며 아이들로 인해 미국의 삶에 겨우 뿌리를 내리는 듯했지만 여전히 저는 이방인의 삶으로 스스로 자가 격리하는 경우가 그동안 많았던 것 같습니다.


브런치를 알게 된 것은 행운처럼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브런치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들, 사랑과 슬픔과 아픔과 기쁨과 위로가 한데 어울려 스멀스멀 피어나는 사람들의 냄새가 태평양을 건너왔습니다. 읽기에서 쓰기로 나간 사람들. 쓰기가 모여 책이 되어 다시 읽기로 돌아가는 브런치에는 잊혀가던 그리운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했습니다.


저 멀리 바다 건너로 전하고 싶은 말들을 저도 주워 담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거짓말처럼 타전을 시작했습니다. 우우, 우, 우, 거짓말 같은 내 시를, 글을.

노력하고 애를 썼지만 길이 닫히기도 하고, 계획하고 준비한 것이 아닌데 문이 열기도 합니다. <영주권은 없지만 이력서는 쓸 테야>에서 저는 영주권을 얻는 과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요. 삶은 그만큼 복잡하게 많은 사람들과 엮여 있다는 것을요. 그 열고 닫히는 문고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써왔습니다. 사는 일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우연한 기회로 미국 회사에 취업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저의 삶에 소중한 이야기들로 남았습니다.

준비한다고 가는 길이 더 쉬워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뒤로 물러나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 셋 키운 경험은 큰 자산이 되어주었습니다. 그 자산을 가진 엄마로 영어가 부족한 가운데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일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영주권은 없지만 이력서는 쓸 테야>에서 저는 이력서를 쓰면서 깨달았습니다. 엄마로 아이들과 함께 한 소중한 일상들과 그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엄마로서의 삶은 이력서에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는 것을요. 이것은 한 사람의 유의미한 일상의 묵살이고 증발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력서에 단 한 줄로도 요약되지 않는 삶이었지만 저는 열심히 살았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비록 이력서에 쓰이지 않지만 그 일상의 이력은 내 삶을 든든히 지켜나갈 힘을 주었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일터에서 사람들 속에서 그것들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쓰기와 읽기를 통하여 그 묵살과 증발에 대항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이방인 같이 느껴져 스스로 자가 격리하는 중이거나 자가격리하고 싶은 이가 있나요? 내 마음을 열고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었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으신가요? 따듯한 한 잔의 커피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쉬이 열어줍니다.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 줍니다. 따뜻한 커피 같은 글 한잔이 그리운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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