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아이스티를 만들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생각하다

by 미쓰조앤

동네에 최근에 생긴 다리 / 조앤

월요일 아침 아이스티를 만들 때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메릴 스트립이 생각났다.


뜨거운 한낮 여름날, 그녀는 단아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흰색은 아니었고 옅은 크림색이었다. 목의 칼라는 각지지 않은 둥그런 셔츠와 같았고, 허리까지는 빈틈없이 꼭 맞게 등을 조이다 허리부터 치마는 살짝 퍼졌다. 길이는 무릎을 살짝 가렸다. 텍사스에서 여름을 나고서야 그녀의 갈증이 좀 더 실감이 났다. 그녀의 실상은 어떠했을지 불현듯 떠올랐다.


한 여름에 해당하는 6월 중순에 나는 텍사스에 도착했다.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차로 이동해왔다. 나의 꿈이었다. 대륙을 횡단하고 싶었던 오랜 바람. 텍사스까지는 미국 대륙의 반을 건너는 셈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리면 22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했다. 북쪽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서 출발하여 남쪽 샌디에고로 내려갔다가 서부 해안가를 시작으로 동쪽을 향하여 달리고 달렸다. 이틀 동안 남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머물기를 잘했다 할 만큼 텍사스까지의 경유는 불모지 그대로였다. 캘리포니아를 벗어나자 차 밖은 38도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를 벗어난 후부터 중간 경유지는 호텔에서 자는 것 말고 다른 일정을 정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운전은 시작했으니 끝내야 할 일이었다. 왜 이리 새로운 게 없을까 싶었으나 그는 나에게 운전대를 주지 않았다. 사실 시내 운전보다 쉬운 길이었다. 오고 가는 트럭들뿐 일반 차들은 많지 않았다. 작은 도시 다운타운을 통과할 때만 신호등에 걸렸다. 그 후는 다음 도시가 나올 때까지 신호등 없는 일방통행의 연속이었다. 나는 나 혼자 사막을 뚫고 나 혼자 이 광활한 땅을 거치는 상상을 그의 옆에서 해야 했다. 내가 운전해도 된다고 말했다. 혼자 운전하는 거 힘들지 않냐고. 그는 괜찮다며 5박 6일간의 대륙 이동을 혼자 운전하는 것으로 마쳤다.


아무도 연고 없는 텍사스 이주 결정은 내가 했다.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다른 건 날씨뿐이라며. 캘리포니아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이웃들이 생겨났고, 아이들에겐 친구들이 늘어갔다. 그 모두를 뒤로하고 텍사스로 이사 결정을 한 이유는 날씨 빼고는 캘리포니아보다 삶의 질이 더 높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2008년 캘리포니아 연방 정부가 파산 직전까지 재무 상황이 악화되자 당장 공립학교부터 열악해지는 것을 나는 아이들 초등학교 시절 본의 아니게 목격하게 되었다. 학교는 선생님들을 더 충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막내가 유치원 과정에 들어갔을 때 오전 오후 반이 생겼다. 유치원 학생 수를 12명 이하로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나는 애플 본사 뒤편에 살고 있었으나 아이들의 학교는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급기야 내가 사는 작은 도시에서는 부모들에게 일정 금액을 기부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유치원 학급을 12명으로 유지하기 위한 교사 지원금을 모집한다는 게 기부의 취지였다.


미국 공립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이다. 12년 교육 기간을 법으로 정해놓았는데 이는 아이들이 교육받을 권리라고 명시해 놓았다. 부모나 보호자가 대안 교육 없이 자퇴, 학교 안 보내기를 할 수 없다. 이는 아이들의 권리 침해로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큰 아이가 학교생활을 힘들어해서 남편과 나는 학교 가는 것이 더 부정적인 영향만 받으니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립학교, 홈스쿨링 등의 대안 교육 증명이 없으면 이는 불법에 해당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반드시 어떤 장소에서든 12년 동안의 의무 교육은 아이들에게 침해될 수 없는 중요한 권리였다. 이 전제하에 12년의 교육 프로그램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텍사스로 이사 오던 해 2011년은 기록적인 폭염으로 기록되었다. 100일 동안 40도 밑으로 기온이 내려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열대야를 제대로 실감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캘리포니아의 온화한 날씨에 길들여진 나는 다른 건 날씨밖에 없다는 자신감이 이때 꺾이고 말았다. 새벽에는 좀 나아지려나 마당으로 나가 보았지만 최저로 낮아진 기온이 30도였다. 마침 잔디의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시간이라 사방으로 분수처럼 물이 뿜어져 올라왔는데 시원하지 않았다. 열기를 내리지 못한 공기가 코에 맴돌자 5분을 참지 못하고 들어와 버렸다. 낮의 온도가 35도씩이나 가 아니었다. 35도만 되어라로 나의 주문이 바뀌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35도의 날씨는 긴급상황에 해당되어 야외 활동이 제한될 만큼 날씨의 변동폭이 적었다. 나는 여름에 에어컨을 쓰지 않아도 되는 동네에서 살았다.

계단없는 학교의 측면, 정문은 건너편에 있다/Facebook

새 학교로 전학 준비를 하기 위하여 우리 식구 모두가 중학교를 방문하던 날은 8월 초순이었다. 처음 길이라 학교의 출입문을 찾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건물의 앞과 뒤가 똑같이 보였다. 주차를 하고 출입문이라고 생각하고 간 곳은 잠겨있었다.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5분 사이 나의 안경테가 달궈졌다. 목에 걸은 차 열쇠가 달궈졌다. 숨을 들이켤 수 없는 뜨거움이 밀려들었다. 눈의 안구로 열기가 느껴졌다. 반바지와 반소매로 드러난 팔과 다리의 피부가 따끔따끔 따가워졌다. 그 잠깐 사이 반대편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타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여기 문 열었어!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이 냅다 건물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올 때 학창 시절 읽었던 유치환의 <생명의 서>가 생각났다. 비로소 그 시를 텍사스에 와서 이해하게 된 셈이었다.


생명의 서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는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아이스티를 만들기 위해 큰 홍차 한 팩을 뜨거운 물에 5분 정도 담가 두면 해가 기울어 흐릿해져 가는 하늘처럼 홍차 팩에서 연한 밤색이 피어오른다. 나뭇잎 냄새가 난다. 작은 손으로 찻잎을 따서 등에 걸머진 큰 대나무 바구니에 따낸 찻잎을 담았을 여린 손가락이 함께 아른거린다. 연한 잎을 따낸 연한 손. 따낸 찻잎을 볶았으니 초록은 숨을 죽여 땅의 색으로 바뀌었다.


우려낸 홍차 팩을 버려야 한다. 쓸모를 다한 몸을 기다란 찻수저로 꾸욱 누른다. 우러나온 물 2리터와 같은 양의 얼음을 담아서 차의 열기를 급하게 식혀준다. 얼음까지 더해지면 옅은 밤색은 황금 빛깔의 아이스티로 완성된다. 찻잎은 볶아도 나뭇잎 냄새를 버리지는 못했나 보다. 떫은맛은 내 감각 밖이다. 즐길 만한 맛이 아니다. 녹차와 또 다른 세계다.

더운 여름날 메릴 스트립은 아이스티를 마시겠냐고 낯선 그에게 물었다. 얼음을 가득 채워 건넸던 아이스티는 그의 갈증보다 그녀의 갈증이 더 컸음을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이스티를 건네며 물었던 것이다. 이 갈증과 갈급함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를.


기다란 글라스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해변의 모래를 닮은 황금빛 아이스티를 서서히 따라 붓는다. 나는 떫은맛이 싫으니 브라운 슈거를 잔뜩 올린다. 눈처럼 아래로 쏟아져내리는 설탕을 휙휙 섞어 그대로 한 잔 들고 마당으로 나가 나무 그늘로 해를 피한다. 역시 이럴 땐 원피스가 제격이다. 맨발이면 더 좋다.


나뭇잎이 서걱거리는 그 아래서 생각하련다.

난 나에게 아이스티를 건네며 물으련다.

너는 너를 잃어가고 있는지를,

너의 갈증은 무엇인지를.